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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회로 통한 중국식 무역 장벽 회피 경계선 확보 전 규칙 다지기 나선 미국 관세로 촉발된 미·중 분쟁, 신뢰 훼손으로 확대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포괄적 관세 재검토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가운데, 중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최종 조정 내용을 주시하고 있다. 이번 재검토는 단순한 관세율 조정의 문제가 아닌, 무역 경로 재편을 포함해 원산지 위장 문제, 세계 경제 재정렬 등을 둘러싼 본질적 의제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중심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 핵심축으로 부상한 '미중 경제 패권의 재균형'이라는 정책 궤적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 관세 회피 위해 원산지 위장
29일 외교가와 무역업계에 따르면 최근 중국 기업들은 미국의 관세 영향을 줄이기 위한 대안으로 제3국 경유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 기업이 베트남이나 멕시코, 일본과 같은 국가를 경유지로 활용하거나 선적지를 해당국으로 바꾸면, 미국 시장에 보다 우호적인 조건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환적(transshipment)’이라 불리는 이 전략은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현시점 새롭게 주목받는 지점은 환적에 대한 미국의 규제 강도다. 미국 통상당국과 세관은 최근 원산지 조작 행위에 대한 규제 강화 방안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들은 이러한 관행이 정책의 실효성을 약화시키고, 그 결과로 무역 불균형이 지속된다고 지적한다. 환적은 당초 관세 검토 제도의 목적 자체를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관세 협상 발표가 지연되고 있는 일부 국가 목록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 국가가 중국 수출품의 ‘압력 밸브’ 역할을 할 수 있어서다. 미 정부도 이러한 누수 지점(leakage points)의 차단 여부가 전체 관세 정책의 성공 여부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이를 제대로 봉쇄하지 못하면 정책 전반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미-EU 관세 협상과 중국의 전략적 재조정
하지만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2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미·중 무역회담에서 양국은 새로운 관세 체계의 윤곽이 잡힐 때까지 본격적인 협상 방향 설정을 유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중국은 미국이 자국 제품에만 아니라, 제3국을 통한 간접 수입까지 얼마나 강경하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협상 태세를 조정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관세율이 아니라 관세 우회 경로에 대한 미국의 대응 수위가 향후 미·중 통상 갈등의 주요 변수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최근 타결된 미·유럽연합(EU)의 무역 합의는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주로 공급망 재편과 팬데믹·인플레이션 충격으로 타격을 입은 산업의 안정을 목표로 했다면, 트럼프 진영의 개정 전략은 다시금 강경 노선으로 복귀하는 양상을 띤다. 특히 이번 EU와의 합의는 다수 유럽 주요국에 불안감을 남기는데, 미국이 단순히 교역 물량 조정에 그치지 않고 세계 무역 질서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는 인식을 강화한 결과로 풀이된다.
유럽 정책당국자들도 이번 협상 결과에 대해 불균형적이라는 우려를 내비치고 있다. 미국의 시각에만 과도하게 부합하려 할 경우 EU는 대(對)중국 협상에서 자율성과 협상력을 동시에 잃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벨기에의 일부 고위 인사들은 이번 합의를 두고 “순응을 가장한 전략적 패배”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 중국은 유럽의 미온적 수용 태도를 주의 깊게 주시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읽어낸 핵심 신호는 두 가지다. 미국이 글로벌 무역 기조 설정에서 주도권을 확고히 하고 있다는 점과 이를 견제할 만한 역량은 지금의 파편화된 저항만으론 지속되기 어렵다는 현실이다. 이에 중국 상무부는 현재 대미 무역 전략은 물론, 글로벌 협력의 전반적 구도를 재점검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정책과 생산 방식 모두에서 대대적인 조정 가능성이 감지되는 분위기다.
중국 내부에서는 이미 자립적 경제구조 강화를 위한 노력이 병행돼 왔다. 최근 들어서는 자국 내 제조업 투자 확대, 반도체 기술의 독립, 지역 간 물류망의 회복 탄력성 확보 등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미국이 중국의 수출 메커니즘을 정조준하는 가운데, 중국은 외부 의존도를 줄이고 서방의 제재나 관세 장벽에 취약한 경로를 최소화하는 전략에 집중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딜레마는 여전히 남아 있다. 중국이 일부 부문에서 내수로 전환하고 있다 해도, 글로벌 시장은 여전히 자국의 잉여 생산력을 흡수해 줄 필수 시장이기 때문이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공세가 전면화될 경우 중국은 새 게임의 룰에 맞춰 체질을 전환하든지, 아니면 핵심 산업에서의 고립을 감수하든지 양자택일을 강요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과 그 중심에 선 중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어서도 중국과의 승부는 단순한 경제적 과제가 아닌 정치적 필연이다. 최근 진행되는 관세 재검토 작업은 과거의 타협적 무역 관행을 일종의 정화 대상으로 설정하며 미국이 더 이상 비대칭적 규칙, 환율 왜곡, 산업 정책의 불균형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세우는 프레임으로 포장돼 있다.
실제 트럼프 경제팀의 핵심 인사인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새로운 관세 체계가 단순히 경쟁의 장을 공정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이 ‘다른 규칙’을 적용받을 수 있다는 국제사회의 기존 인식을 재정립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베선트 장관은 특히 구조 설계 못지않게 집행력도 관건이라고 강조하며, 서류 조작이나 환적과 같은 편법을 통한 회피를 철저히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 같은 강경 노선이 적지 않은 여파를 동반한다는 데 있다. 우선 중국산 중간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주요 교역국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수 있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불확실성이 여전한 글로벌 경제 환경 속에서, 이러한 정책이 세계 각국 간 분열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여기에 중국의 대응도 변수로 지목된다. 중국 정부는 과거에도 미국의 관세 조치에 맞서 농산물, 빅테크, 심지어 문화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보복 조치를 취해 왔다. 이번에는 보다 정교한 형태의 대응이 예상되지만, 갈등이 다시 격화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정치적 실익이 리스크를 상회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대중 강경 노선은 자국 유권자에게 강력한 어필 수단일 뿐 아니라, 미국 제조업계와 중소기업의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향후 발표될 최종 관세 목록은 오늘날의 무역 정책이 더 이상 단순한 공급망이나 통계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통상 정책이 국가 의지, 명분 경쟁, 글로벌 영향력의 시험대로 변모하고 있다는 의미다.
결국 중국으로서도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통상 충격을 묵묵히 감내하며 조용한 재편을 택할 것인지, 혹은 노골적인 보복에 나설 것인지를 가늠해야 한다. 다만 전자는 기존 수출 시스템의 지속을 가능하게 할 수 있지만, 후자는 세계 경제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