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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전 총리, ‘아베 독트린’ 이어받아 日 군비 증강 제한 완화
장거리 타격 무기 도입 등 통해 ‘글로벌 안보 주역’으로 성장
중국 위협 경계하는 국내 여론 힘입어 국방 예산도 증액
[동아시아포럼] 섹션은 EAST ASIA FORUM에서 전하는 동아시아 정책 동향을 담았습니다. EAST ASIA FORUM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Australia National University) 크로퍼드 공공정책대학(Crawford School of Public Policy) 산하의 공공정책과 관련된 정치, 경제, 비즈니스, 법률, 안보,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분석 플랫폼입니다. 저희 폴리시 이코노미(Policy Economy)와 영어 원문 공개 조건으로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기시다 후미오(Kishida Fumio) 전 총리의 체제 아래 일본은 국방과 대외 정책에서 향후 지속될 변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지지율 하락과 아베 신조(Abe Shinzo) 전 총리 암살로 인한 곤경에도, 기시다 전 총리 임기 중 일본이 지역 및 글로벌 안보 영역에서 보다 능동적인 역할로 한 계단 올라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차기 내각은 일본이 지향하는 규칙 기반의 국제 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가 정착할 수 있도록 방위 전략을 유지 발전시켜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기시다 내각, ‘우방국 관계 강화’와 일본 ‘군사 작전 제한 완화’에 주력
일본을 상징하는 ‘온건 보수주의’(small-c conservatism)는 느린 속도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인들의 점진적 변화 선호는 일본이 다수 민주 국가들에서 야기되는 양극화 및 극우 세력의 부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도록 해준 요소기도 하다. 다만 일본은 외부 압력에 대응해 스스로 선택한 변화에 대해서는 끝까지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보여왔는데 현재 진행 중인 대외 및 국방 정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기시다 내각의 3년 중 많은 부분은 아베 전 총리의 국가 안보 정책을 심화 발전시키는 데 치중됐다.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과의 관계 강화와 일본의 군사 작전 제한 완화가 그것이다.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국가 방위의 역할을 미일 동맹의 틀 안에서 이뤄지는 ‘방어’에 국한하는 ‘평화주의 정책’을 견지해 왔으나 새롭게 도입된 국가 안보 정책은 방향을 완전히 달리한다. 재임 기간 중 벌어진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에서의 전쟁, 그리고 대만 해협에서의 긴장 고조 등 글로벌 현안들이 기시다 전 총리의 결단을 재촉했고 아베 내각에서 외무상을 역임한 그는 당면한 대외 문제의 복잡성을 헤쳐 나가는 데 적임자였다.
일본 방위 정책의 핵심인 ‘아베 독트린’(Abe Doctrine)을 이루는 핵심은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과의 동맹 강화 △일본 군비 증강 제한의 완화 △규칙 기반의 국제 질서 수호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실제로 일본은 중국의 증가하는 영향력과 공격성에 맞서 지역 안보 문제에서 점점 더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는데 기시다 전 총리의 접근 방식은 전략적이면서 시의적절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비교적 진보적인 이미지를 활용해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누그러뜨렸고 한국과 필리핀 등 주변국의 정권 교체를 관계 강화에 활용하기도 했다.
한국과는 셔틀 외교를 통한 관계 강화로 양국 정보공유협정(intelligence-sharing agreement) 정상화와 한국에 대한 수출 통제 완화라는 성과를 거뒀고 현재 양자기술(quantum technology), 인공지능(AI), 경제 안보 분야에서도 협력을 도모하고 있다. 필리핀에는 공식 안보 지원(Official Security Assistance)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해안 감시 레이더를 제공하고 상호 접근 계약(reciprocal access agreement, RAA)을 체결해 양국 합동 군사 작전 원활화라는 결실을 이뤘다.
장거리 타격 무기 도입 결정으로 ‘원거리 적대국’까지 겨냥
또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기시다 대외 정책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는데 중국 견제를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 유지에 노력한 아베 전 총리와 달리 러시아에 대한 다자간 제재(multilateral sanctions)에 합류함으로써 신속히 서방 국가들의 편에 서는 모습을 보였다. 더불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y)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히로시마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에 초청하는 등 NATO와의 관계 강화에도 앞장섰다. 아울러 대외 무기 제공 관련 규제까지 완화해 가며 우크라이나에 패트리어트 미사일(Patriot missiles)을 제공함으로써 근접 지역을 벗어난 안보 문제에도 개입하려는 변화까지 선보였다.
기시다 전 총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본 내에서도 방위 역량 강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 법안들을 추진했다. 2022년 5월 통과시킨 경제 안보 촉진법(Economic Security Promotion Act)이 대표적이다. 이 법안은 미중 간 갈등 상황을 헤쳐가기 위해 국가 방위와 경제 안보를 조화시키려는 목적하에 도입됐고 같은 해 12월에는 국방비 관련 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2%까지 증액시키기도 했다.
국가 방위 측면에서 기시다 전 총리의 특기할 만한 성과 중 하나는 2025년으로 예정된 400기의 토마호크 미사일(Tomahawk missile) 포함 장거리 타격 무기 도입이다. 해당 조치는 일본이 유지해 온 미일 동맹하의 ‘방어’ 역할에서 벗어나 원거리에 있는 적대국까지 겨냥하겠다는 포석으로, 미일 군사 작전의 현대화로까지 논의 주제를 확대하기도 했다. 또 개혁의 대상을 군사 장비에 국한하지 않고 ‘보안 허가 시스템’(security clearance system) 구축과 사이버공격에 대한 선제 대응을 위한 법안을 마련하는가 하면, 임기 막바지에는 일본 구축함들이 대만 해협을 통과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
중국 위협 절감한 일본 국내 여론이 ‘국방비 지출 확대’ 지지
그러나 이러한 국방 정책에서의 진전된 성과에도 기시다 전 총리의 리더십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도전을 겪었다. 특히 자민당 내 핵심 후원자이면서 막후 유력자인 아베 전 총리의 2022년 암살 사건은 기시다 전 총리의 정치 자본에 크나큰 손실로 기록되고 있다. 아베 전 총리의 지원 없이 당내 리더십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결국 기시다 내각은 스캔들로 얼룩진 불명예를 맞이하게 된다.
다만 기시다 전 총리가 주도한 일본의 국방 전략 전환은 일본 내 여론의 힘을 업고 큰 반발 없이 진행되고 있다. 2008년 이후 중국과의 해상 분쟁을 지켜보면서 점점 더 많은 일본 국민들이 미일 동맹 강화와 군사비 지출 확대에 지지를 표하게 된 것이다. 이제 안보, 군사 전문가들이 TV 방송에 나와 군사 작전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 됐고 다양한 군사 관련 입문서들을 도쿄 시내 서점에서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다. 결국 중국의 위협 앞에 국민들이 느끼는 절박감이 기시다 전 총리가 국방 개혁을 별 저항 없이 진행하는 데 큰 힘이 돼준 셈이다.
이제 기시다 전 총리의 시대가 가고 이시바 시게루(Ishiba Shigeru) 신임 총리가 일본 국내 정치 문제와 함께 국방 및 대외 정책을 계승 발전시켜야 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시바 총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개혁 확대를 위한 지지층을 결집하고 국방 정책 전환의 추진력을 유지 확대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아베 전 총리의 지지로 국내 정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던 기시다 전 총리와 비교해 이시바 총리의 국내 정치 통합은 더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더구나 정치적 경쟁자들을 내각에 포함하려는 시도마저 실패한 지금, 오는 27일로 예정된 중의원(House of Representatives) 선거는 그의 정치생명을 건 첫 번째 시험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원문의 저자는 테라오카 아유미(Ayumi Teraoka)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 웨더헤드 동아시아 연구소(Weatherhead East Asian Institute) 박사 후 연구원입니다. 영어 원문은 Japan’s enduring defence pivot under Kishida | EAST ASIA FORUM에 게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