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넘치는 자금에 중대형급 VC는 ‘실적 잔치’
초기 펀드 조성도 실패, 중소 VC ‘빚잔치’
상생협력기금 등 정책자금 의존도 높아져
벤처캐피탈(VC) 업계의 양극화가 심화하는 모습이다. 고금리 장기화와 투자시장의 한파 속에서도 일부 대형 VC는 괄목할 만한 실적을 거둔 반면 중소·신생 VC들은 신규 펀드 조성에도 실패하는 등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는 전 세계적 흐름으로, 올해 역시 비슷한 전망이 제기되면서 중소형 VC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소수 대형 VC에 몰린 자금
1일(현지 시각) 시장조사기관 피치북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기업에 투자한 VC 수는 6,175개로 2021년(8,315개)과 대비 25.7%(2,140개) 줄어든 것으로 파악됐다. 집중도도 심화했다. 지난해 미국 VC 업계가 조달한 710억 달러 중 절반 이상은 제너럴카탈리스트, 안데르센호로위츠, 아이코닉그로스, 스라이브캐피털 등 상위 9개 VC에 의해 모금됐다.
이와 관련해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위험 회피 성향을 가진 금융 기관들이 실리콘 밸리의 대기업에 자금을 집중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진단하며 “이는 투자 시장의 역학을 왜곡시켜 스페이스X나 오픈AI, 데이터브릭스 등 초거대 스타트업들이 비상장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하며, 작은 기업들의 자금 조달 옵션은 갈수록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국내 벤처투자 시장으로 오면 이와 같은 양극화는 더 선명히 드러난다. 지난해 1분기 국내 상장 VC 19곳의 전체 매출은 2,130억원, 영업이익은 999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2023년 벤처투자 혹한기 속에서도 매출 8,427억원, 영업이익 3,189억원 등 실적 개선에 성공한 데 이은 호실적이다. 이들 상장 VC는 까다로운 증시 문턱을 넘은 중대형급 VC들인 동시에 업력 또한 수십 년을 자랑한다. 2023년 말 기준 상장 VC 가운데 총운용자산(AUM)이 가장 큰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를 예로 들면 2조원이 넘는 자산을 굴리고 있다.
반대로 중소형 VC들은 자본잠식에 빠지는 곳이 눈에 띄게 늘며 보릿고개를 맞았다. 지난해 7월 기준 자본잠식으로 경영개선요구 조치를 받은 VC는 △더시드인베스트먼트 △오라클벤처투자 주식회사 △엔피엑스벤처스 △네오인사이트벤처스 △도원인베스트먼트 등 5곳에 달했다. 당국의 경영개선요구 조치로부터 3개월 이내 자본잠식률을 50% 미만으로 끌어내리지 못하면, 최대 6개월의 2차 시정명령을 받게 된다. 그 이후에도 개선하지 못하면 벤처투자 회사 등록 말소 여부를 심사해 라이선스를 반납해야 한다.
이들 가운데는 펀드 결성 및 투자 집행 이력이 없는 곳도 존재한다. 2021년 설립된 도원인베스트먼트가 대표적 예로, 해당 VC는 경영 건전성 기준 미충족으로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다. 애초 도원인베스트먼트는 비상장 기업 중 투자가치가 유망한 기업을 발굴하고, 투자 후 기업공개(IPO)까지 육성하는 투자 전문 기업을 목표로 출범했다. 하지만 펀드를 결성 및 투자를 집행 이력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업계는 도원인베스트먼트의 사례처럼 펀드 결성 자체에 실패하는 VC가 쏟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 한 중소 VC 관계자는 “투자 업계 전반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달고 살지만, 중소형 VC들은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며 “펀드 결성 단계부터 실패하면 줄줄이 나가는 고정비를 감당할 수 없어 자본잠식은 시간 문제”라고 말했다.
중·후기 단계 스타트업 투자하는 벤처 펀드 급감
이처럼 중소형 VC를 정조준한 투자 업계의 한파는 2023년을 기점으로 본격화했다.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과거 모험자본에 적극적으로 자금을 공급하던 기관들이 줄줄이 출자를 축소한 탓이다. 결성총액이 1,000억원 이상인 대형 벤처 펀드 수는 2021년 21개, 2022년 17개에서 2023년에는 3분기까지 단 5개에 그치며 혹한기의 시작을 알렸다.
대형 벤처 펀드는 벤처투자는 물론 금융시장 전반의 업황까지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로 불린다. 이들 대형 벤처 펀드는 사업이 성숙기에 돌입한 중·후기 단계 스타트업에 주로 투자하는데, 대형 펀드 결성이 증가한다는 것은 상장 등 자금 회수 시장 또한 원활히 흘러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2023년을 ‘전에 없던 불황의 해’로 정의하기도 했다. 2022년 이미 미국발 금리 인상이 시작했고, IPO 시장 위축으로 VC들의 투자금 회수에도 먹구름이 꼈지만, 앞서 언급했듯 그럼에도 2022년 한 에만 17개 대형 벤처 펀드가 결성된 바 있기 때문이다.
업계는 기관투자자들의 투자 심리 위축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모태펀드 예산이 줄어들면서 민간 또한 보수적인 출자 기조로 돌아섰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벤처투자 ‘큰손’으로 연기금 및 공제회의 2023년 상반기 벤처 펀드 출자액은 1,07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80%가량 쪼그라들었다. 한 중견 VC 대표는 “고금리 기조 속 기관이 투자 위험이 큰 벤처 펀드로의 자금 집행을 줄이는 것은 이해가 간다”면서도 “다만 중·후기 스타트업 투자를 주로 하는 대형 VC로만 자금을 몰아주면 초기 스타트업은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이 된다”며 업계의 암울한 분위기를 전했다.
‘가뭄 속 단비’ 정책자금에 실낱같은 희망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소 VC는 상생협력기금을 비롯한 정부의 정책자금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상생협력기금은 대기업, 공공기관 등이 중소기업과 상생협력 촉진을 위해 대·중소기업 및 농어업협력재단에 출연하는 기금이다. 2004년 재단 설립 근거가 마련됐고, 2017년에는 중소벤처기업부가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촉진법상 출연 근거를 마련했다.
상생협력기금을 출연한 기업은 법령에서 정한 범위 내에서 기금의 용도를 지정할 수 있다. 기존에는 △기술협력 촉진 △임금 격차 완화 △기금 운용 △거래 공정화 등 기존 12가지 용도였지만, 지난해 6월 시행령 개정으로 벤처기금(펀드)출자가 새롭게 추가됐다. 누적 기금은 지난해 5월 기준 2조4,021억원 수준이다.
VC 업계에서는 정책자금 통로가 확대됐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 한 VC 업계 관계자는 “상장 기업은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투자 산업군이 명확한 데 반해 벤처투자 섹터는 명확히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짚으며 “막강한 자금력을 등에 업은 대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기술력 있는 스타트업조차 성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초기기업 발굴이라는 벤처투자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중소형 VC들에 단비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