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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기아, 美 현지 재고 바닥 가격 조정 불가피하지만 인상 주저 토요타-혼다도 점유율 지키기 안간힘

현대차가 미국의 고율 관세로 올해 영업이익이 크게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실적을 방어하기 위해선 미국에서 가격을 올려야 하지만, 가격을 올리면 토요타 등 주요 경쟁사의 가격 수준을 웃돌아 섣불리 올리지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수입차 관세 부과에 따른 가격 인상 압박에도 가격을 동결하며 시장 지배력 강화를 택했던 상반기 전략을 하반기에도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연간 영업익 5~6조 감소 전망
1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다수 증권사는 현대차의 목표 주가를 하향 조정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수입차 25% 관세 영향으로 수익성이 악화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메리츠증권은 지난달 보고서를 통해 “미국의 수입차 관세율이 유지될 경우 현대차의 연간 영업이익이 6조2,600억원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지난해 영업이익(14조2,396억원)의 44%에 해당하는 규모다. 메리츠증권은 현대차의 목표 주가도 기존 31만원에서 26만5,000원으로 낮췄다.
한화투자증권도 현대차의 올해 영업이익이 5조4,000억원 줄어들 것이라며 목표 주가를 31만원에서 27만원으로 내렸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증권사의 현대차 2분기 영업이익 평균 전망치(컨센서스)는 전년 동기 대비 약 16% 감소한 3조6,000억원으로 집계됐다.
현대차는 미국 앨라배마주(州)의 공장에서 현지 판매 차량을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조지아주에서 친환경차를 생산하는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도 가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에서 판매하는 차량 중 60%는 한국에서 생산된다. 미국에서 인기가 많은 하이브리드차와 제네시스 차량은 대부분 울산 공장에서 만들어 수출한다.
앞서 이승조 현대차 재경본부장은 지난 4월 진행한 1분기 실적 관련 콘퍼런스콜에서 “미국 판매 가격은 일단 동결할 예정이지만, 6월 2일 이후에는 상황을 보면서 인상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지난달 2일 이후 한 달이 넘도록 가격 인상 폭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고 바닥난 현대차, 깊어지는 고심
현대차는 미국에서 일본의 토요타, 혼다 등과 주로 경쟁한다. 지금껏 현대차는 이들 업체보다 가격은 소폭 낮고 뛰어난 성능을 가진 차라는 점을 앞세워 미국 시장을 공략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가 인상에 나서면 가격이 비싸져 판매량이 급감할 수 있다. 현대차의 중형 세단 쏘나타는 미국에서 평균 2만6,650~3만6,745달러(약 3,685만~약 5,080만원)에 판매된다. 경쟁 모델인 토요타의 캠리는 2만8,700~3만6,425달러, 혼다의 어코드는 2만8,295~3만560달러로, 쏘나타의 최저가는 캠리, 어코드보다 6~7% 낮고, 최고가는 오히려 비싼 수준이다. 만약 현대차가 관세 충격을 줄이기 위해 10%만 가격을 올려도 쏘나타의 최고 가격이 4만 달러(약 5,530만원)에 달해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
미국 시장에서 판매하는 다른 주요 볼륨 모델(대량 판매 차량)도 같은 상황이다. 준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Sports Utility Vehicle)인 투싼은 2만8,000~4만2,970달러에 판매된다. 토요타 RAV4의 가격은 2만8,850~4만2,355달러, 혼다 CR-V는 3만100~4만2,495달러다. 토요타, 혼다의 경쟁 모델과 가격 차가 거의 없는 상황이라 관세를 먼저 가격에 반영하기가 어렵다.
이런 가운데 미국에 쌓아둔 재고마저 바닥나면서 현대차의 고심은 더 깊어지는 눈치다. 그간 현대차를 재고를 통해 가격 경쟁력을 지켜왔다. 현대차는 지난 4월 기준 미국 내 약 3개월치, 기아는 약 2개월 치 재고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단순 계산하면 현대차는 약 한 달 분이 남았고, 기아는 이미 재고가 바닥난 셈이다. 재고가 떨어지는 시점부터는 관세로 인한 타격이 본격화된다. 현지 생산 물량으로 한계가 있는 차종은 수입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판매 가격을 올리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팔아도 기존보다 수익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토요타-혼다도 눈치 싸움
토요타, 혼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서둘러 가격을 올릴 경우 현대차와의 가격 차가 지금보다 벌어져 실적 방어가 어려워질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차를 판매하는 주요 완성차 업체들은 가격 인상을 예고하고도 얼마나 올릴지는 결정하지 못한 채 서로 눈치 싸움만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토요타의 경우 이달 초 미국 판매 가격을 대당 평균 270달러(약 40만원) 올렸지만, 이는 연식 변경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인상으로 아직 관세를 반영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한 완성차업계 관계자는 “국가별 상호 관세는 협상을 통해 세율이 낮아질 수 있지만, 자동차는 품목별 관세라 조정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 현지 생산량을 늘려야 하지만, 단기간에 국가별 생산 물량을 바꾸기도 쉽지 않다. 전기차 판매량도 보조금 지급 기간이 끝나는 10월부터 급감할 가능성이 커 현대차가 실적을 방어하기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짚었다.
업계에서는 자동차 관세가 장기화되면 가격 인상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보면서도, 어떤 업체가 가장 먼저 가격을 인상할지를 주시하는 분위기다. 한 업체가 가격 인상을 결정하면 경쟁 브랜드들이 반사 효과를 누리기 위해 오히려 가격 동결 기한을 늘리면서 출혈 경쟁을 벌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 자동차 제조사 간부는 "대중 브랜드 성격상 관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만큼 당장은 미국 내에서 브랜드 입지와 점유율을 지키는 것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며 "먼저 인상하는 브랜드를 기다렸다가 브랜드 선호도와 점유율의 반사효과를 보는 업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당장 타격이 생기더라도 신중하게 접근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