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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산 ‘원산지 세탁’ 루트 정조준
韓 자동차 등 품목별 관세 협상 먹구름
동남아 활용 중국, 역대급 무역 실적

미국이 전 세계 각국과의 무역 협정을 통해 중국산 제품의 환적을 통한 우회 수출을 봉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은 상반기 동남아 수출을 크게 늘리는 등 환적 경로를 적극 활용해 왔지만, 미국은 이를 원산지 세탁 시도로 보고 전방위 단속에 나선 모습이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한국의 자동차 산업 등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농후하며, 글로벌 해운과 공급망 구조에도 큰 변화를 불러올 전망이다.
베트남과 ‘원산지 추적 협정’, 중국산 우회로 차단
14일(이하 현지시각) 무역 업계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우회해 관세를 회피하는 환적(換積) 행위에 대한 견제에 나서면서 글로벌 무역 질서 또한 상당한 변화를 맞이할 전망이다. 앞서 지난 2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상호 관세를 기존 46%에서 20%로 낮추고, 제3국을 경유하는 환적 상품에 대해서는 40%의 관세를 부과한다는 내용의 무역 합의 내용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공개했다.
환적은 한 나라에서 선적된 화물이 제3국을 거쳐 최종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선박을 바꾸는 수준이라면 최초 선적국의 원산지가 유지되지만, 물건의 실질적 변형이 발생하면 제3국 제품으로 간주될 수 있다. 결국 이번 미국 정부의 조치는 단순한 우회 수출을 넘어 ‘중국산 제품을 다른 국가에서 조립하거나 통과시키는 방식’ 전반을 재정의하려는 움직임에 가깝다는 해석이다.
해운업계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환적 규제가 본격화되면 전반적인 해운노선 자체를 다시 설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시아~미국 간 직항 비중이 낮고 동남아 환적이 보편화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환적 규제가 시행되면, 해운사들로선 중국을 경유하는 경로를 최소화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는 곧 해상 물류 비용이 상승세로 전환될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환적은 자유무역 질서 내에 자리 잡은 합법적 물류 방식이지만, 미국이 특정 국가와 맺는 협정을 통해 사실상 ‘비공식 차단’을 시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런 방식이 확산할 경우, 중국뿐만 아니라 중간 경유지로 활용되던 국가들까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무역의 패러다임이 단순 원산지에서 공급 경로 중심으로 옮겨가는 가운데, 환적의 의미 또한 ‘경로상의 회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지적이다.

환적 추적 강화, 동맹국까지 확산 조짐
이런 가운데 한국 또한 미국의 환적 규제를 비껴갈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일 14개국에 상호관세 서한을 발송하면서 전통적 우방이자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부터 최우선 표적으로 삼았다. 그는 “‘25%’라는 숫자는 무역적자 폭을 줄이는 데 턱없이 낮다는 점을 이해하기 바란다”며 “관세를 피하기 위해 제3국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환적한 제품에는 25%보다 더 높은 관세를 매길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 같은 상호관세가 이미 시행 중인 품목별 관세와 별개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를 놓고 미국무역대표부(USTR) 부대표 출신인 웬디 커틀러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ASPI) 부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는 한국과 일본의 최우선 순위인 자동차 등 품목별 관세 완화를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현재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와 자동차부품에 25%, 철강과 알루미늄에는 50%의 품목별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한국은 그간 미국과의 협상에서 품목별 관세 완화 필요성을 여러 차례 전달했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달 초 워싱턴DC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을 만나 “한미 제조업 협력이 조속한 시일 내 구체화되고 성공적으로 이행되려면 자동차·철강 등 품목별 관세 철폐 또는 완화가 최종 합의에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업 등 트럼프 행정부가 원하는 미국의 제조업 재건에 적극 협력할 테니 품목별 관세를 철폐 내지 인하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다만 미국 측은 품목별 관세가 별개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협상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미·중 무역 ‘경로 전쟁’으로 전면전 확산
결국 이번 조치의 핵심은 단순한 관세율 조정을 넘어 생산 및 물류 경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전방위적 추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중국산 제품에 고율 관세를 매기는 것은 물론, 중국산 제품이 동남아 등 제3국을 경유해 미국으로 유입되는 우회 전략 자체를 전면 차단하겠다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을 포함한 복수의 동남아 국가가 중간 경유지 역할을 하면서 미국 기업이나 해운사들이 중국산 제품의 원산지를 세탁하는 데 활용됐다는 게 미국 정부의 판단이다.
올 상반기 중국의 동남아향 수출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점도 이 같은 미국의 판단에 힘을 보탠다. 중국 세관총국에 의하면 올해 6월 중국의 수출은 전년 동기보다 5.8% 증가한 3,250억 달러(약 449조원)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상반기 전체 수출은 1조8,100억 달러(2,500조원)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무역 흑자 역시 5,860억 달러(약 808조원)로 사상 최대 규모에 도달했다.
지난달 중국산 제품의 미국향 수출은 전년 대비 16.1% 감소했다. 앞서 5월 34% 이상 급감한 데 이어 두 달 연속 감소세다. 하지만 이 같은 수출 감소분은 다른 시장에서의 판매 증가로 만회됐다. 같은 기간 중국의 10개 동남아시아 국가로의 수출은 전년 대비 17% 급증했다. 특히 철강 제품의 경우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인도네시아 등지로 대거 이동했다. 중국의 반제품 철강 수출은 올해 첫 5개월간 300% 이상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