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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반발 선제 차단, 고율 관세 강행
상대국, WTO 제소 및 보복 관세 시사
대미 무역흑자국 일제히 ‘비상 체제’
관세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가 글로벌 무역 질서의 붕괴를 불러올 것이란 전망이 제기됐다. 캐나다와 멕시코, 중국을 겨냥한 고율 관세가 국가 간 무역 협정 체제를 무력화하고, 상황은 중국에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유무역 기조의 핵심인 세계무역기구(WTO) 또한 무용지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미국 ‘황금기’ 위해 고통 불사하겠단 트럼프
2일(이하 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글로벌 무역 시스템과 세계 무역 질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면서 “이는 공개 투자와 자유 시장을 중시하는 미국 경제를 중심축으로 삼았던 시스템의 와해를 뜻한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결국 국제 경제 질서는 중국에 유리하게 재편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1일 캐나다와 멕시코, 중국에 대한 관세 부과 강행 방침을 밝혔다. 그는 “펜타닐 등 마약과 불법 이민자 유입을 차단하려는 의도”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조처에서 미국의 3대 교역국을 그 첫 대상국으로 삼으면서 특정 품목이나 산업이 아닌 모든 수입품에 관세를 매기기로 했다. 나아가 상대국이 이번 조처에 반발해 보복을 가할 경우, 해당 국가에 대한 관세율을 추가 인상하는 ‘보복 조항’ 또한 행정명령에 포함했다.
이를 위해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국제경제비상권한법(IEEPA)까지 동원했다. IEEPA는 미국의 안보나 외교, 경제 등에 위협이 되는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대통령에게 외국과의 무역 등 경제 활동을 광범위하게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이다. 의회나 백악관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반발을 선제 차단하려는 의도다.
미국의 경제학자들과 비즈니스 그룹, 의회 내 일부 의원들은 즉각 “잘못된 처방”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조처로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치솟고, 산업이 마비돼 중국이 더욱 강력한 글로벌 무역 허브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나라에 보편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위협함에 따라 다른 나라들이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강화하는 요인을 제공했다”고 강조했다.
로이터통신 또한 무역 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로이터는 마크 마렉 시버트 파이낸셜 최고투자책임자(CIO)를 인용해 “시장은 이번 조치에 영향을 받을 것이며, 지금까지 시장은 그(트럼프 대통령)의 편이었지만, 처음으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세계적 무역전쟁 리스크는 미국 기업의 수익에 타격을 주고 금리 인하 기대 또한 무산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각계의 비판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황금기’를 위해서는 일부 고통을 감내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2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미국은 캐나다, 멕시코, 중국(그리고 거의 모든 나라)과의 교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고 있으며, 그렇게 떠안은 부채는 36조 달러(약 5경2,500조원)에 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우리는 더 이상 ‘멍청한 나라(Stupid Country)’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미국에서 제품을 생산하면 관세가 부과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미국이 쌓아 올린 자유무역 기조, 미국 손에 무너지나
중국과 캐나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 조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기로 했다. 다만 WTO 제소의 경우 무역분쟁 해결에 워낙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WTO 탈퇴를 위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집권 1기 당시에도 WTO 체제 무역 질서 아래에서 미국이 적지 않은 손해를 보고 있다고 탈퇴를 위협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미국 내 보수 세력 또한 WTO의 최혜국대우(MFN) 조치로 미국이 수입 상품에 비대칭적인 낮은 세율을 부과하고 있으며, 이는 무역수지 적자의 주요 원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크 델로르 연구소 싱크탱크의 연구원 엘비어 파브리는 AFP통신에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트럼프 당선인은 어떤 규칙도 따를 의사가 없어 보인다”며 “미국은 WTO에서 탈퇴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미국은 이미 WTO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다”고 반색했다.
캐나다는 이번 조처에 25%의 보복관세를 예고했으며, 멕시코는 안보 및 공중보건 협상을 제시했다. WTO 제소부터 보복 관세 카드까지 나오면서 글로벌 무역시장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시계 제로’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아시아 사회정책연구소의 웬디 커틀러 전 미국 무역협상가는 “우리의 친구, 이웃, 자유무역협정(FTA) 협정 파트너들이 사선에 있다”고 진단하며 “거센 압박 속에서 일종의 타협안이 도출되기 전까지는 강대강 대립이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NATO 동맹도 실리 앞에선 무용지물
트럼프 대통령은 캐나다와 멕시코, 중국에 그치지 않고 그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으로 느슨한 동맹을 유지해 온 유럽연합(EU)에도 관세의 칼날을 드러냈다. 그는 “EU에 대한 관세 부과 시점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곧 시행할 것”이라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EU가 농산물과 자동차를 충분히 수입하지 않아 미국의 무역적자를 확대한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이다.
EU는 즉각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EU 집행위원회는 2일 성명을 내고 “(미국의) 보편 관세 조치는 사업 비용을 늘리고 근로자와 소비자에게 해를 끼친다”고 짚으며 “또한 필요 이상의 관세는 경제적 혼란을 초래하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고 일갈했다. 이어 “만약 EU 제품에 불공정하고 자의적 방식의 관세가 부과되면, 집행위는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 내 주요국과 기관들도 우려를 표명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관세장벽 없는 자유로운 교역이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 대표는 “EU가 단결해 미국과 협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클라스 노트 유럽중앙은행(ECB) 정책위원은 “새로운 관세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과 금리 상승을 유발해 유로화 약세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유럽은 4억 명의 소비자를 보유한 강력한 무역 블록”이라며 “미국이 주도하는 무역전쟁은 모두에 피해를 주는 자멸책이 될 것”이라고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