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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금 지급 철회하고 반도체 수입품에 관세 부과" 미국에 대대적 투자 단행 韓 기업 불확실성 고조 국내 정국 혼란 장기화에 통상 압박 파고 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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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지원법(칩스법)’에 대해 '터무니없다'는 비판을 쏟아내며 칩스법에 따른 보조금 지급을 철회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한 우리 기업들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미국과 정상회담에 나선 일본과 달리, 국내 정국 혼란이 길어지면서 통상 압박의 파고에 속수무책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트럼프 "칩스법, 터무니없다"
11일(현지 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외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철회하는 대신, 반도체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보조금 지급 계획에 대해 "이런 터무니없는 프로그램은 필요 없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그는 "외국 반도체 기업이 보조금을 원하지 않도록 만들겠다"며 "대신 25%, 50%, 심지어 10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반도체업계에서는 TSMC가 미국에서 추진 중인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총 650억 달러(약 94조4,000억원)를 투자해 반도체 생산 공장을 건설 중이며 미국 정부는 칩스법을 통해 TSMC에 66억 달러(약 9조6,000억원)의 보조금과 50억 달러(약 7조3,000억원)의 저리 대출을 지원하기로 했었다. 특히 애리조나 공장에서는 오는 2028년부터 2나노미터(2nm) 반도체 생산이 예정돼 있어 애플 등 미국 기업들의 반도체 수급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TSMC는 미국 내 투자계획을 유지할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전문가들은 보조금 철회가 현실화될 경우 TSMC의 애리조나 공장 운영이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미국 IT 매체 나인투맥은 "이미 착공된 공장은 이른바 ‘매몰 비용’이므로 가동될 가능성이 높지만 추가적인 투자나 확장은 재검토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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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기업도 투자 계획 차질
대만뿐 아니라 한국 반도체 기업들도 이번 조치에 따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 칩스법의 대표적인 수혜국 중 하나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미국 인텔(85억 달러), 대만 TSMC(66억 달러)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의 보조금 64억 달러(약 9조3,000억원)를 받기로 돼 있다. 전체 투자 금액 대비 보조금 비중은 약 12.8%으로 두 회사보다 높다. 지원 규모로 7위인 SK하이닉스에는 4억5,000만 달러(약 6,500억원)가 배정됐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내 생산시설을 확대하는 전략을 추진 중이지만 보조금 철회와 높은 관세가 부과될 경우 투자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 달러(약 24조7,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 중인데 보조금 지급이 불확실해질 경우 추가 투자 결정이 어려워질 것으로 관측된다.
K-칩스법 기재위 문턱 넘었지만, 탄핵 정국 속 풍전등화
더 큰 문제는 수출을 견인하는 반도체 산업이 위기를 맞이했음에도 계엄 및 탄핵 정국으로 인해 정책적 대응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한국은 반도체 시설에 조 단위 지원을 하는 미국, 대만, 일본 등과 달리 세액공제 혜택만 적용하고 있다. 이에 여야가 공감대를 이뤄 국내 반도체 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여당이 당론으로 지정했지만 추가된 ‘고소득 연구개발(R&D) 직군 주 52시간 규제 적용 예외’ 조항에 대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이를 두고 업계 비판이 쏟아지자 여야는 결국 11일 칩스법을 통과시켰다. 법안이 13일 기재위 전체회의를 통과하면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이르면 이달 본회의에서 처리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기업에 적용되는 통합투자세액공제의 경우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20%로, 중소기업은 30%로 5%포인트씩 상향한다.
반도체 R&D(R&D) 세액공제 일몰 기한을 7년 연장하는 내용도 통과됐다. 일몰 기한 7년 연장은 지난해 여야 간사 간에 잠정 합의가 이뤄졌지만 이후 기재위 전체회의가 열리지 않아 처리되지 못했고 정부안인 3년 연장만 처리됐다. 신성장·원천기술과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R&D 세액공제는 5년 연장돼 2029년 말까지 적용한다.
다만 한미 간 협의는 과제로 남아 있다. 지난달 24일 미국이 손해 보고 있는 것은 없는지 다시 살펴보겠다며 나선 트럼프 대통령에 대응해 정부 차원의 첫 논의가 진행됐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익 최우선 원칙을 강조하며 “파급효과가 큰 사안을 중심으로 그간의 대응 방향을 재점검하고 대외경제현안간담회를 통한 순차 대응, 기업과의 적극적인 소통 추진할 것”을 주문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서명한 ‘미국 우선주의 무역 정책’ 각서의 파급력을 고려한 지시로, 이 각서에는 미국이 체결한 기존 무역협정을 재검토하고 적절한 개정을 권고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구체적인 국가를 지목하진 않았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