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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O 데뷔 무대서 유럽 책임론 강조 “나토 가입이 유일한 종전안” 우크라이나 vs. 러시아 “우크라 영토 18% 포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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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데뷔 무대에서 우크라이나의 종전안을 일축했다. 크림반도 등 러시아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는 우크라이나를 향해 허황된 꿈을 버리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주재로 본격적인 종전 협상이 시작될 전망인 가운데, 우크라이나가 전쟁 발발 이후 견지해 온 영토 수복에 대한 의지를 꺾을지 이목이 쏠린다.
美, 우크라 나토 가입 부정적
12일(현지시각) 헤그세스 장관은 벨기에 브뤼셀 나토 본부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방위연락그룹(UDCG)’ 회의에 참석해 우크라이나 전쟁의 조속한 종식을 강조하면서 “비현실적 목표(illusionary goal)를 버리라”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도 여러분처럼 주권적이며 번영하는 우크라이나를 원하지만, 비현실적인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부연했다.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는 것이 힘들다는 점을 수긍하고, 조속히 종전 협상에 임하라는 의미다.
이어 헤그세스 장관은 “종전 후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을 위해 유럽 및 비유럽 국가로 구성된 다국적 군대 주둔이 필요하다”면서도 “미군이 파병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두겠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우크라이나의 숙원인 나토 가입 또한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는 평화유지군은 나토의 임무와는 별개의 사안이며, 나토 조항 제5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집단방위를 상징하는 제5조는 “회원국 일방에 대한 무력 공격을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필요시 무력 사용을 포함한 원조를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함께 헤그세스 장관은 유럽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미국에 과도한 의무를 지우는 불균형적 관계를 참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은 나토 동맹 및 유럽과 안보 파트너십에 계속 전념할 것”이라면서도 “다만 유럽은 스스로 안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데 있어 유럽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다.
헤그세스 장관이 나토 본부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그가 이날 참석한 UDCG 회의는 조 바이든 전임 미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국제사회 지원 논의를 위해 만든 장관급 협의체다. 나토 회원국은 물론 한국 등 전 세계 약 50개국이 참여한다. 다만 우크라이나 지원에 다소 회의적 태도를 보여온 트럼프 정부가 출범을 기점으로 UDCG의 지속 여부 역시 불투명한 상황이다. 바이든 정부에선 UDCG를 미국이 주도해 왔으나, 트럼프 정부는 회의 좌장을 영국에 넘겼다. 이에 따라 이날 회의도 존 힐리 영국 국방장관 주재로 개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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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크림반도·돈바스 수복 및 나토 가입 의지 강경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가능성을 일축했으나 우크라이나의 입장은 강경하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무력 침공 이후 줄곧 같은 발언을 되풀이 중이다.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정식 가입 초청을 하는 것이 러시아 침공에서 우크라이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자, 전쟁을 종식하는 길이라는 주장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도 이 같은 종전안을 들고나왔다.
그는 “나토 가입 초청은 우리 국민들과 군인들의 사기를 높일 것”이라며 “가입 초청은 나토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 국민들과 그들의 어린 자녀가 죽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호소했다. 나토 규정상 ‘가입 초청’은 신규 회원국으로 가입할 때 필요한 첫 번째 절차로, 32개 회원국 만장일치 찬성이 필요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통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낼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푸틴이 고립되고, 다른 파트너들에 의해 외교에서 떠밀릴 때 전쟁 또한 끝날 것”이라고 단언했다.
나토 회원국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주축인 미국과 독일만은 반대의 뜻을 표명 중이다. 우크라이나의 가입으로 자칫 러시아와 나토 간 갈등이 고조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당시 대선 후보였던 트럼프 대통령 역시 당선 후 전쟁을 되도록 빨리 해결하겠다면서도 미국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지난해 11월에도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전쟁의 과열 국면을 막기 위해 우리가 통제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지역을 나토의 보호 아래 둬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다만 “한 나라의 특정 지역만 나토에 가입할 수는 없다”고 짚으며 “그럴 경우 나머지 땅은 러시아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서방에서는 분단된 나라에 나토 회원국 자격을 주는, 이른바 ‘서독 모델’에 대한 논의가 오랜 시간 이어져 왔지만 아직 공식 제안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언급한 ‘나머지 땅’은 러시아가 점령 중인 크림반도와 동부 돈바스 지역을 의미한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 과정에서 크림반도 내 러시아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이후 2022년에는 본격적으로 무력 침공에 나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일대를 점령, 장악 중이다.
양보 없는 러시아, 젤렌스키 사임 촉구
반면 러시아는 자국이 점령 중인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군이 철수하고 나토 가입을 포기해야만 평화 협상에 나서겠다는 주장을 꺾지 않고 있다. 지난해 6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러시아 동결자산의 이자 수익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겠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군이 자포리자, 헤르손, 도네츠크, 루한스크 지역에서 철수하고 등 네 지역에서 철수하고, 나토 가입 의사를 거둔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평화 회담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6월 기준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는 전체 영토의 약 18%에 달한다.
최근에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러시아 사업가 콘스탄틴 말로페예프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허가한 장거리 무기 사용을 금지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을 사임시켜야 한다”며 “푸틴과의 최고위급 회의에서 세계질서 문제를 논의해야만 분쟁이 막을 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거두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종전에 관한 말로페예프의 이 같은 주장은 푸틴 대통령이 휴전 조건으로 제시한 우크라이나 동남부 4개 주 및 나토 가입 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간 말로페예프는 크렘린의 강경 정책을 외부에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자처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