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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 일가 지분 높은 지주사들 배당 확대하며 ‘주주환원’ 강조 밸류업 명분 내세워 실리 채우는 상장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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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당국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기 위한 밸류업 정책을 추진한 가운데, 배당 확대를 결정하는 상장사들이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실적이 악화된 상황에서 이뤄지는 배당에 대한 우려가 크다. 특히 실적 악화에도 배당을 결정한 이들 기업 상당수는 오너 일가 지분이 높은 경우가 많다 보니, 투자자들 사이에선 밸류업 프로그램을 명분 삼아 배를 불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적 악화에도 배당 확대하는 상장사들
17일 투자금융업계에 따르면 최근 실적을 발표한 신세계는 악화된 실적과 함께 확대된 배당 계획을 공개했다. 신세계는 면세사업이 부진해 지난해 순이익이 44% 감소했다고 발표하면서도 보통주 1주당 4,500원을 배당한다고 발표했다. 자회사 롯데케미칼이 1조8,000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하며 지난해 적자 전환한 롯데지주도 보통주 1주당 1,200원 배당을 결정했고, 지난해 순손실이 6,000억원에 육박하는 이마트도 보통주 1주당 2,000원의 배당을 결정하면서 올해 배당금은 최고 2,500원까지 높이겠다는 내용의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내놨다.
GS그룹의 지주사인 GS 또한 깜짝 고배당주로 등극했다. GS는 보통주 1주당 2,700원을 배당하기로 결정했다. 배당 발표 전 주가가 3만8,000원 수준에서 움직인 것을 고려하면 시가 배당률이 7.0%에 이른다. 전년도 배당금은 1주당 2,500원이었다. 하지만 GS 역시 실적은 부진하다. 지난해 자회사 실적이 악화되면서 GS 순이익은 1년 전의 절반 수준인 8,428억원에 그쳤다.
회사가 경영 활동으로 얻은 이익을 주주들과 나누는 배당 재원의 핵심은 당해 순이익이다. 이익이 감소하면 배당 여력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들 상장사가 배당을 확대한 건 오너 일가가 필요한 현금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으로 해석된다. GS와 신세계 모두 승계가 이뤄지고 있는 기업집단으로, 경영권과 함께 지분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막대한 세금이 부과되기 때문에 현금이 필요하다. 실제 GS의 경우 허창수 명예회장을 비롯한 허씨 일가가 보유한 지분이 53%가 넘으며, 신세계의 경우 정유경 회장이 회사 지분 18.6%를 보유하고 있고, 이명희 명예회장의 보유 지분도 10.0%다.
GS와 신세계의 경우 별도의 사업을 영위하지 않는 지주회사라는 점도 배당 확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주회사가 아닌 정유사 SK이노베이션 역시 대규모 적자 전환에도 배당 확대를 발표했다. 2023년도에는 배당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1주당 2,000원 배당을 결정했다. SK이노베이션은 배당 재원으로만 2,975억원을 쓸 예정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과거 대기업의 배당은 ‘지배주주 배 불리기’라는 프레임에 비판받았는데, 금융 당국이 기업의 배당을 독려하고 나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며 “밸류업을 명분으로 내세워 실리를 챙기는 상장사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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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환원은 밸류업 목표 아닌 수단, 밸류업 목적은 기업가치 제고
이유야 어찌 됐든 배당을 확대하면서 주주 환원에 공력을 들이는 기업은 금융 당국이 추진하는 밸류업 프로그램의 모범 사례가 됐다. 한국거래소는 배당을 포함한 주주환원을 밸류업을 위한 중요 정책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상장사 배당액이 전년 동기보다 소폭 증가한 34조원이라는 수치를 공개하면서 기업의 주주환원이 강화되고 있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다만 기업가치 제고 계획이 손쉬운 배당에 쏠리면서 금융당국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밸류업 정책의 핵심은 기업 특성에 맞춰 주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것인데, 기업들이 배당 확대에 초점을 맞추면서 ‘주주 환원이 곧 밸류업’으로 인식돼 정책을 추진하는 당국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우리 주식시장에는 장치 산업 중심의 제조업 비중이 높은데 이들의 경우 배당을 무조건 확대하는 것은 오히려 투자 여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기업 특성에 맞춘 가치 제고 계획을 실행하고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주주 환원도 확대하는 균형을 찾는 게 밸류업의 맞는 방향”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의 우려도 깊어지고 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지난해 실적이 부진하고 올해도 딱히 묘수가 없어 보이는 기업이 배당을 대폭 확대했길래 부정적으로 코멘트했더니, 회사 측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면서 “최근 CEO 사이에서 배당 확대 바람이 불다 보니 부작용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목표는 주주환원이 아닌 기업가치 제고인데 기업들이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우진 서울대학교 교수는 "주주환원은 밸류업의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고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기업들이 주주환원을 늘려야 밸류업에 참여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오해"라며 "밸류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주환원과 재투자를 통해 기업가치와 시가총액을 올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밸류업지수’ 종목 3개 중 1개 지배구조 불량, 신뢰성 의문
실제로 기업 가치를 올리겠다며 만든 한국거래소의 코리아 밸류업지수 종목 3개 중 1개는 지배구조 평가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밸류업지수 전 종목(105개)을 한국ESG기준원 ESG평가 지배구조 등급과 대조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의 34.3%(36사)가 B 이하 등급을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ESG기준원은 매년 10월 전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상장사와 주요 코스닥 상장사를 대상으로 ESG등급을 발표한다. 등급은 S부터 D까지 총 7단계로 부여되는데 B 이하 등급은 지배구조 등이 취약해 개선이 필요한 ‘열위’ 등급으로 분류된다.
전체 종목 중 지난해 C 이하 등급을 받은 상장사 비중도 20%(21사)에 달했다. 한미반도체(D), DB하이텍(D), 리노공업(D) 등 시가총액이 1조원이 넘는 대형 종목은 지배구조 등급에서 최하점을 받았지만 밸류업 지수에 포함됐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추진되기 전인 2023년에도 지난해와 비슷한 38.8%(40사)가 지배구조에서 B등급 이하를 받았고 23.3%(24사)는 C등급 이하를 기록했지만 밸류업지수에 포함됐다. 특히 2년 연속 B등급 이하로 지배구조에서 낙제점을 받은 밸류업지수 종목은 4곳 중 1개꼴인 25개 종목에 육박했다. 이 중 동국제약, 한미반도체, 다우데이타, 이수페타시스 등 10개 종목은 2년 연속 C등급 이하를 받았다.
이렇다 보니 당장 지난 11일 발표된 밸류업우수기업 선정 기준도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거세다. 한국거래소는 지배구조 B등급 이상 종목만 우수기업에 선정될 수 있다고 밝혔으나 여기엔 지배구조가 ‘다소 취약’한 B등급도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서지용 상명대 교수는 “지배구조와 관련해 밸류업지수에서 적당한 평가기준이 없고 선정 기준이 잘못됐다”며 “졸속으로 선정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