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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리야드서 미·러 고위급 회담 개최 당사국 우크라이나·유럽 배제한 채 진행 우크라戰 3주년 앞두고 종전 협상 급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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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진행된 미국과 러시아 간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이 종료됐다. 협상 과정에서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배제된 데 대한 반발이 거세지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초 지난해 임기가 종료될 예정이던 젤렌스키 대통령의 정당성을 문제 삼으며 정권 교체 가능성을 시사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는 푸틴 대통령이 휴전 이후 우크라이나에 새로운 친러시아 정부를 세우려는 움직임과 맞물리며 향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첫 종전 협상, 미·러 관계 정상화와 대화 재개에 초점
18일 (현지 시각) 미국과 러시아가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진행한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이 4시간 30여 분 만에 종료됐다. 회담 직후 유리 우샤코프 크렘린궁 외교 담당 보좌관은 "러시아와 미국 간 고위급 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며 "양측의 입장이 가까워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루고 싶었던 모든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며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갔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번 회담에서 가장 주요한 목표는 실제로 미·러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있다"며 "러시아의 협상 대상국은 오직 미국임을 강조했다.
이날 회담에는 미국 측에서 마크 루비오 국무장관과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스티브 위트코프 중동특사가, 러시아 측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과 우샤코프 보좌관이 참석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외무장관이 배석했다. 로이터통신, 러시아 타스통신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미·러 양측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간 회담 조건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당장 다음 주에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은 작지만, 논의에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비오 장관은 회담 후 기자들과 만나 "이번 협상에서 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고위급 협상단 설치를 포함한 4가지 원칙에 합의했다"며 "워싱턴과 모스크바에 있는 대사관에 직원을 복귀시켜 기능을 정상화하고 양자 관계의 회복을 비롯해 보다 광범위한 협력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유럽은 러시아 제재 해제 논의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그간 러시아에 취해진 제재를 풀 의지가 있음을 시사했다. 지정학적·경제적 협력과 관련해서는 에너지와 우주 탐사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BBC는 이번 협상에 대해 "러시아가 별다른 양보 없이 국제사회 복귀에 가까워졌다"며 "옛 소련 시절부터 서방권을 상대해 온 러시아의 베테랑 외교관들이 미국을 압도하며 마치 러시아가 세계 최정상 외교 테이블에 올라 미국으로부터 조건을 제시받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평가했다. 다만, 태미 브루스 국무부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이번 회의는 러시아가 전쟁 종식에 대해 미국과 같은 생각을 가졌는지, 종전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는지 확인하는 자리였다"며 "세부 사항에 대해 구체적인 협상이 진행된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트럼프 패싱 논란 속 유럽·우크라이나 강하게 반발
반면 이번 협상에 초대받지 못한 우크라이나는 자국이 빠진 종전 협상은 절대 인정하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앞서 지난 12일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종전의 조건으로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배제 △2014년 이전 국경 모든 영토 회복 △평화유지군 미군 파견 불가의 조건을 천명해 우크라이나로서는 입장이 난처해진 상황이다. 이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 16일 NBC방송이 공개한 인터뷰에서 "전쟁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우크라이나를 뺀 어떤 결정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럽에서는 트럼프의 '패싱'에 서둘러 지난 17일 긴급 회의를 진행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주최한 비공개 회의에는 마르크 뤼터 NATO 사무총장,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 등이 참석했다. 유럽 측의 반발이 커지자 루비오 장관은 "유럽연합(EU)이 향후 협상에 참여할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19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하는 키스 켈로그 우크라이나·중동 특사 역시 "우크라이나에 평화협정을 강요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여전히 모든 것은 테이블 위에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리야드 회담 종료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정권 교체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발언하면서 종전 협상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18일 트럼프 대통령은 사저인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기자들에게 "우크라이나에서 선거가 치러지지 않았고 사실상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라며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지율이 4%에 불과하고 나라도 산산조각이 났다"고 말했다. 또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이 협상에서 배제됐다며 강하게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데 대해 "협상 테이블에 앉고 싶다면 먼저 오랫동안 선거가 없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 않나"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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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우크라에 친러 정부 수립해 속국으로 만들려 해
젤렌스키 대통령을 겨냥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일각에서는 미국과 러시아의 평화 계획이 휴전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러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가 종전 협상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으로 대선 실시를 요구함으로써 반(反)러시아 성향의 젤렌스키 대통령 퇴진을 우회적으로 압박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친러시아 정권 수립, 군사 규모 축소 등을 주장하며 사실상의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드러내 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임기는 지난해 5월까지였다. 당초 임기 종료에 맞춰 같은 해 4월에 대선이 예정돼 있었지만, 전쟁과 계엄령으로 인해 연기됐다. 당시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를 비롯한 일부 서방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대선을 치러야 한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을 압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키예프 국제사회연구소(KIIS)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우크라이나 국민 중 85%가 대선 연기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에 대해 당시 CNN은 "국민의 지지를 받는 우크라이나의 대선 연기를 민주주의의 후퇴로 볼 수 없다"고 보도했다.
유럽 정치권에서는 전쟁 발발 후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가 40%포인트가량 하락한 점을 고려할 때 종전 이후 선거가 실시되면 그의 정치적 미래가 불확실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KIIS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의 신뢰도는 2022년 전쟁이 시작할 때 90%까지 치솟았으나 지난해 12월에는 52%까지 하락했다. 특히 미국과 EU의 군사 지원이 좌초되고 러시아의 공습이 격화하던 지난해 2월(64%)과 5월(59%)에 눈에 띄게 지지율이 떨어졌고 전쟁 후 최저치를 12월 조사 역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부로 진격하는 중에 실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