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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각가 두고 견해차 좁히지 못해
‘사야 할 이유가 없는 시장’ 열려
저가 매물 과잉 공급에도 수요↓

OK금융그룹이 추진 중인 페퍼·상상인저축은행 인수가 모두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 페퍼저축은행은 대주주가 매각을 재검토할 것으로 알려졌으며, 상상인저축은행은 매각가를 놓고 OK금융 측과 뜻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저축은행을 향한 금융당국의 압박이 갈수록 그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시장엔 매물이 넘쳐나면서 누구도 선뜻 인수전에 참여하지 않는 모습이다.
매각도, 인수도 ‘모두 멈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페퍼저축은행 운영사 호주 페퍼그룹은 페퍼저축은행의 매각을 잠정 중단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OK금융이 페퍼저축은행 인수를 위해 지난달 14일부터 실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양측 모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매각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는 전언이다. 한 투자은행(IB) 관계자는 “처음부터 양측의 인수합병(M&A) 의지가 강하진 않았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낮은 몸값이 페퍼저축은행 매각 중단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장이 추산한 페퍼저축은행의 매각가는 자기자본(3,795억원)에 주가순자산비율(PBR) 0.9배를 적용한 3,400억원 수준이다. 그러나 페퍼저축은행의 실적이 부진한 만큼 실제 매각가는 이보다 훨씬 낮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페퍼저축은행의 지난해 자산 총액은 2조8,913억원으로 전년(4조7,188억원) 대비 38.7% 감소했고, 연체율은 9.82%에 달한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PBR 0.4~0.5배 수준에서 매각가가 정해질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상상인저축은행 인수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앞서 OK금융은 상상인저축은행에 대한 실사를 마치고 지난 2월 적정 인수가를 제시하는 등 협상을 추진했다. 애초 시장에서는 상상인저축은행의 매각가를 PBR 0.9배 수준인 2,000억원 수준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OK금융이 PBR 0.5배 수준을 제안하면서 협상이 중단됐다.
OK금융이 이처럼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매각이 시급한 상상인저축은행의 절박함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 앞서 유준원 상상인그룹 대표는 2020년 7월 불법 대출상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주가조작에 나선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과 벌금 185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금융당국은 지난해 상상인에 상상인저축은행과 상상인플러스저축은행 지분을 90% 이상 매각하라고 명령했다.
상상인은 금융위원회를 상대로 대주주 적격성 유지조건 충족명령 및 주식처분명령 취소소송을 냈으나, 최근 서울행정법원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결국 상상인으로선 저축은행 계열사 매각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다만 지난해 말 흑자 전환에 성공한 만큼 최대한 제값을 받겠다는 게 상상인저축은행의 입장이다. 상상인저축은행의 지난해 4분기 일반기업회계기준(K-GAAP) 영업이익은 90억원(잠정치)으로 2022년 3분기 이후 첫 흑자를 기록했다.

살 이유 없는 원매자 vs. ‘그 가격엔’ 팔기 싫은 매각 주체
시장에서는 인수 주체인 OK금융보다는 매각 측인 페퍼저축은행과 상상인저축은행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현재 상황은 ‘사야 할 이유가 없는 시장’과도 같다는 판단에서다. 그에 대한 근거로는 금융당국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관리 강화를 꼽았다. 실제로 금융감독원은 이달 10일 한국투자저축은행을 비롯한 일부 저축은행 최고경영자(CEO)를 불러 PF 관련 대출을 전면 중단할 것을 통보하는 등 대출 규제 강화에 고삐를 죄고 있다.
과거에는 저축은행이라는 간판만 있어도 PF 대출을 활용해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였지만, 지금은 그 틀이 완전히 깨졌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금감원이 모든 저축은행에 PF를 중단하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PF 고정이하비율 등을 근거로 얼마든지 제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결국 사실상 대출 중단과도 같은 무거운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 상상인저축은행을 인수하는 기업을 두고 “규제만 남은 껍데기를 떠안는 꼴”이란 냉소적인 반응을 내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매각은 필요하고 시간도 촉박한데, 인수자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들어갈 이유가 전무하단 지적이다. 아울러 강제 매각 드라이브가 걸렸던 정권이라면 정책적 사인도 작동할 수 있지만, 지금은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더해져 더더욱 나설 필요가 없다는 평가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유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제외하면 상상인저축은행으로선 딱히 잘못한 것도 없지만, 그냥 ‘시장에 나온 시점이 나빴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넘치는 매물 소화 위해선 규제 완화 절실
M&A 시장에 나온 매물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도 페퍼저축은행과 상상인저축은행의 매각을 방해하는 요소다. 현재 시장에서 잠재 매물로 거론되는 저축은행은 페퍼와 상상인을 포함해 총 10곳(페퍼·상상인·상상인플러스·HB·OSB·조은·유니온·애큐온·대원·대아저축은행)이다. 이 가운데 시장에 나온 지 가장 오래된 매물은 대원저축은행으로 지난 2018년 LED업체 시티젠이 인수를 추진했지만, 대주주 적격성 심사에서 고배를 마신 바 있다.
애큐온저축은행의 경우 신입생에 속한다. 애큐온저축은행의 대주주는 유럽에 기반을 둔 사모펀드 운용사 EQT파트너스다. EQT파트너스는 지난 2022년 홍콩계 사모펀드 베어링PEA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애큐온캐피탈과 저축은행을 함께 사들였다. 통상 사모펀드 운용사가 인수 4~5년 차에 엑시트(투자금 회수)를 시도하는 만큼 매각이 머지 않았을 것이란 분석이다.
그러나 아직 금융당국이 원하는 저축은행 간 인수합병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가장 최근 성공한 저축은행 매각 사례는 한화생명의 한화저축은행 인수다. 지난해 10월 한화생명은 1,785억원에 한화저축은행 지분 100%를 인수했다. 한화저축은행 직전의 사례는 지난 2020년 있었던 우리금융그룹의 아주저축은행 인수다.
시장에서는 저축은행 간 인수합병을 위해 추가적인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현재 저축은행 간 인수합병을 위해서 비수도권에 한해 최대 4개 구역까지 진출할 수 있는데, 이러한 완화책을 수도권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상대적으로 영업 환경이 잘 갖춰진 수도권 저축은행을 중심으로 수익성 회복이 이뤄지고 있는 만큼 시장의 우호적인 환경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는 게 시장 참여자들의 주된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