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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위기 적나라하게 인식
1% 안팎 저성장 기조 본격화
정책 제안 넘어선 비상 메시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국제 행사 참석을 위해 찾은 미국에서 추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시장에서는 통화당국 수장이 추경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이례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외부 청중 앞에서 솔직하게 한국 경제의 위기 상황을 알리려 했다는 점에서 이 총재의 공식 경고를 엄중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현실에 발 디딘 경제’ 강조
23일(이하 현지시각) CNBC에 따르면 이 총재는 이날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와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춘계 연차총회에 참석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무역 긴장이 사라지길 진심으로 바란다”며 “이것은 모든 나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본질적으로 수출 중심 경제로, 이번 무역 긴장은 (한국 경제에) 상당한 역풍이 될 전망”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이에 앞선 21일에는 뉴욕에서 열린 외교정책협회(FPA) 만찬에 참석해 추가경정예산(추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은)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 내수가 예상보다 빠르게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고 진단하며 “연초 성장률 전망의 급격한 하락과 그로 인한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금리 인하와 함께 일정 수준의 추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여야 합의로 추경안이 통과된다면, 한국의 경제 정책이 정치와 분리돼 안정적으로 운영된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어 국가신용 등급 하락 방어에도 효과적일 것이란 판단이었다”고 부연했다.
추경과 관련한 발언이 정치적 중립성 논란을 야기한 것과 관련해 이 총재는 “중앙은행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도 “케인스가 그의 스승 마셜을 가리켜 말했듯이 경제학자는 때로 정치인만큼 현실적일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거시경제학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과거의 경제학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이론과 수식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전개한 바 있다.
이 총재는 ‘정치적 불확실성과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주제로 한 이번 만찬사를 통해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중앙은행이 정부는 물론 정치로부터도 독립성을 확보하는 게 매우 중요하단 걸 인식하게 됐다”면서 “이는 정치적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리고, 필요한 시점에 객관적 정책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그간 대외 환경 변화로 인한 어려움을 가중시켰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다만 한국 민주주의의 강인한 회복력을 확인하는 계기도 됐다”고 강조했다.

수출 타격에 내수 침체 맞물려 구조적 한계 직면
이 총재의 우려대로 최근 국내외 주요 기관들은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일제히 하향 조정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대비 절반 수준인 1.0%로 하향 조정했으며, 블룸버그이코노믹스(0.7%), 캐피탈이코노믹스(0.9%), 씨티그룹(0.8%), 하이투자증권(0.8%), IM증권(0.8%), ING그룹(0.8%), JP모건(0.7%) 등 7개 기관은 올해 한국이 0%대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우리 정부와 한은은 해외·민간 추정치보다 다소 높은 성장률 전망치를 제시했다. 정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밝힌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각각 1.8%, 1.6%였고, 한은은 지난 2월 올해 성장률 전망치로 1.5%를 제시했다. 다만 이 총재는 지난 17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연간 성장률은 1분기 성장 부진을 고려할 때 지난 2월 전망치 1.5%를 하회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당시 이 총재는 “국내 경기는 내수와 수출 모두 둔화하면서 1분기 성장률이 2월 전망치 0.2%를 밑돈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소폭의 마이너스 성장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다음달 29일 발표 예정인 수정 경제전망에서는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기존 1.5%에서 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다.
무기력보단 경제 체력 회복에 방점
한은이 금리 인하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 총재는 “(금리 인하로) 과도하게 경기를 부양하는 것은 부작용을 초래할 공산이 크다”며 “1년 정도는 괜찮을지 몰라도, 나중에 엄청나게 큰 부작용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향후 성장률 전망치를 낮출 가능성이 굉장히 큰 상황이므로 전망 수정치와 금융시장 상황, 외환시장 상황 등을 보면서 적절히 대처할 수 있도록 금리 인하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 총재는 추경의 성장률 방어 기능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는 “한은은 정부지출승수를 0.4~0.5로 보고 있다”면서 “이는 12조원 규모의 추경이 집행될 때 0.1%p 정도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앙은행이 추경을 어느 정도 규모로 하는 게 좋다는 발언을 꺼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구조적인 재정적자로 연결되지 않는 수준에서 일시적 지출로 한정해서 추경을 편성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