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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바이든 행정부 'AI 확산 규정' 폐지 중동도 미국도 규제 완화 이득 확실해 "빅딜 쏟아진다" 美 빅테크 기업들 '쾌재'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조 바이든 정부가 도입한 인공지능(AI) 칩 수출 규제를 전면 수정한다. 중동 국가에 대한 AI 칩 수출 규제를 완화해 오일머니를 흡수하고, 중국의 현지 시장 내 영향력을 축소하겠다는 구상이다. 실제 엔비디아, AMD 등 다수의 미국 기술 기업이 이번 규제 완화를 기회 삼아 중동 지역에서 줄줄이 '빅딜'을 따낸 것으로 확인됐다.
美, AI 칩 '국가별 수출 제한' 없앤다
14일(이하 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이른바 'AI 확산 규정(dissemination rule)'을 공식 폐지한다고 밝혔다. 해당 규정은 전임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도입한 것으로, 타국을 3그룹으로 분류해 미국산 AI 칩 구매를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우선 미국과 핵심 동맹국을 포함하는 ‘이너서클’ 그룹(티어 1)은 미국산 AI 반도체 수입에 제한이 없다. 티어 1에는 ‘파이브아이즈(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참여국과 주요 서유럽국, 한국, 일본, 대만 등 18개국이 포함된다. 주로 남미와 중동, 동남아 국가들로 구성된 '중간지대' 그룹(티어 2)은 미국산 AI 칩을 구입할 수 있지만 나라별로 확보할 수 있는 최대치가 제한된다. 티어 3은 중국, 북한, 러시아, 이란, 시리아 등 22개국이 포함된 이른바 ‘범죄 용의자’ 그룹으로, 사실상 미국산 AI 칩을 수입할 수 없다.
상무부는 성명에서 해당 규제가 수십 개의 국가를 티어 2 국가로 강등해 미국의 외교 관계를 해칠 뻔했다며 조만간 새로운 규제를 마련해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WSJ은 "규정 개편은 수개월에 걸쳐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국가별로 차별화된 접근 방식을 채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중동의 '윈-윈' 전략
AI 확산 규정 폐지 소식은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 순방 중 사우디-미국 투자 포럼에 참석한 직후 전해졌다. 데이비드 삭스 트럼프 행정부 AI 및 암호화폐 책임자는 해당 포럼에서 "확산 규정은 미국 기술이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에 확산하는 것을 막는 조치였다"며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친구들에게 위험은 없다"고 발언했다. 규제 완화를 선언하며 중동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우호적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해당 규제의 폐지는 미국과 티어 2 그룹에 묶인 소위 석유 부국들에 있어 '윈-윈' 전략이 될 수 있다. 사우디,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국가들은 화석 연료에 의존하는 경제를 첨단 디지털 기반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규제로 인해 엔비디아를 비롯한 미국 기업들의 AI 칩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AI 확산 규정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이 중동 지역에 수출할 수 있는 AI 칩 최대 물량은 연간 최대 1,700장에 그친다.
이에 중동은 최첨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해 왔다. 지난해 사우디 펀드가 중국의 AI 스타트업 ‘즈푸AI(Zhipu AI)’에 투자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은 중동을 거쳐 수입이 금지된 엔비디아 AI 칩을 확보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한 시장 관계자는 "미국은 AI 칩 수출 규제 완화를 통해 중동발(發) 오일머니를 흡수하고, 동시에 중국의 반도체 굴기 움직임에도 제동을 걸 수 있게 됐다"며 "중동 국가들은 AI 칩 시장의 선두 주자인 엔비디아의 제품을 필요한 만큼 확보할 수 있게 됐으니, 양측 모두 이익이 확실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美 빅테크 '반사이익'
이번 조치는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에도 명확한 호재다. 규제 완화에 힘입어 중동 지역에서 대형 계약이 줄줄이 체결됐기 때문이다. 13일 엔비디아는 사우디 국부펀드가 소유한 AI 기업 휴메인이 추진하는 100억 달러(약 14조원) 규모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에 자사 최신 고성능 AI 칩인 ‘GB300’을 1만8,000장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를 시작으로 엔비디아는 향후 5년 동안 수십만 장의 AI 칩을 사우디에 공급할 예정이다.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로 인해 발생한 손실을 만회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휴메인의 데이터센터는 500MW(메가와트)급으로, 구글·마이크로소프트(MS) 등 빅테크의 주요 거점 데이터센터(100MW급)의 5배에 달하는 대규모다. 이 같은 초거대 클러스터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엔비디아의 경쟁사인 AMD도 휴메인의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에 AI 반도체와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 대표 네트워크·보안 기업인 시스코는 휴메인의 안전하고 효율적인 AI 인프라 구축을 위해 보안 기술을 공급할 예정이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중동 지역의 AI 투자 부문에도 속속 침투하고 있다. 13일 사우디 벤처캐피털(VC) 기업인 STV는 구글의 지원을 받아 1억 달러(약 1,400억원) 규모의 AI 펀드를 출범한다고 밝혔다. 이 펀드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AI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이들의 인프라 구축·서비스 개발을 지원하게 된다. 구글이 1억 달러 중 얼마를 부담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기업이 개발한 AI 기술도 중동 국가에 빠르게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12일 사우디에 항공기·선박 등에서 쓸 수 있는 위성 인터넷 서비스인 '스타링크'를 제공하고, 테슬라의 자율 주행 로보택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더해 그는 테슬라가 개발 중인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를 트럼프 대통령 및 모하메드 빈 살만(Mohammed bin Salman) 사우디 왕세자에게 선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