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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군 기지 4곳 드론 공격
우크라 ‘협상 무력화 전략’ 취하나
트럼프 외교 카드 사라질 위기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예정된 러시아-우크라이나 2차 종전 협상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스파이더웹 작전’으로 명명된 우크라이나의 대규모 드론 공습이 러시아의 전략 기지를 정밀 타격하며 푸틴 정권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이에 따라 양국의 갈등 또한 심화하는 모습이다. 그간 평화 중재자 역할을 자처해 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번 전쟁에서 발을 뺄 가능성이 커지면서 양국의 종전 논의 또한 원점으로 되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피해액 70억 달러 수준, 푸틴 정권 ‘체면 손상’
1일(이하 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매체 키이우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은 이날 러시아 본토 공군 기지 4곳에 대규모 드론 공격을 단행했다. 이르쿠츠크주에 위치한 벨라야 기지를 비롯해 무르만스크주의 올레냐 기지, 랴잔주의 디아길레프 기지, 이바노보주의 이바노보 기지 등이 표적이 됐으며, 이 과정에서 러시아 전략폭격기 41대가 파손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 측의 피해 금액은 약 70억 달러(약 9조7,000억원)로 추산된다는 게 SBU의 설명이다.
매체는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SBU는 일인칭 시점(FPV) 드론을 러시아로 운송했고, 이후 러시아 영토 내에서는 민간 트럭의 이동식 목조 상자 안에 드론을 숨겼다”며 “적절한 순간 원격 조종을 통해 상자를 열어 드론으로 러시아 전략폭격기를 공격했다”고 작전 수행 과정을 전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직접 지휘한 이번 공격은 준비에 1년 6개월가량이 소요됐으며, 작전명은 스파이더웹(Spider web·거미집)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이번 피격과 관련해 우크라이나 측과 다른 주장을 내놨다. 러시아 국방부는 같은 날 “공군 기지 5곳에 대한 공격이 있었지만, 이르쿠츠크 등 2개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공격은 격퇴했다”며 “이 과정에 소수의 항공기가 피해를 봤고 공격에 가담한 사람 몇 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다만 이 같은 주장은 자국 핵심 군사기지기 정밀 타격당한 것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지도자로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권위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힐 것이란 게 외신의 주된 평가다.
러시아의 분노, 우크라이나의 침묵
양국의 갈등이 심화하면서 이스탄불에서 열릴 2차 종전 협상 또한 무산될 가능성이 커지는 분위기다. 앞서 러시아는 이달 2일 오후 1시 이스탄불 츠라안궁(宮)에서 2차 협상에 나서겠다고 우크라이나 측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는 미국을 포함한 3자 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우크라이나의 요구를 거부한 직후 발표된 것으로, 협상 시점과 방식을 자국에 유리하게 가져가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우크라이나는 이번 종전 협상 참석을 공식화하며 평화 조건을 담은 문서를 전달했다. 해당 문서에는 최소 30일간의 전면적·무조건적 휴전 및 전쟁포로 전원 교환, 러시아 점령지로 이송된 우크라이나 아동의 귀환 추진 등이 명시됐다. 아울러 현재의 전선 위치를 영토 협상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내용 또한 포함됐다. 이 같은 사항들이 지켜진 후 젤렌스키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는 게 우크라이나의 구상이다.
이러한 조건들은 그간 러시아가 공개적으로 요구한 내용들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포기와 자국이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국제적 주권 인정 등을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 측은 아직 자국의 공식 제안이나 입장을 우크라이나 측에 전달하지 않았으며, 2차 협상 당일에 문서를 공개한다는 계획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벌어진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습은 ‘외교적 포기 선언’으로 해석될 공산이 크다. 공습이 벌어진 시점과 방식, 대상 모두 협상 가능성을 크게 낮춘다는 지적이다. 특히 우크라이나가 이번 공격을 감행하면서도 협상과 관련된 어떠한 설명이나 메시지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은 러시아뿐 아니라 중재를 시도해 온 주변국들에도 단절을 시사하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외교계의 주된 시각이다.
이처럼 협상 무산 가능성이 커지며 유럽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즉각 비공식 채널을 통해 협상 복원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러시아 측은 조건 없는 대화는 불가하다는 반응을 내놨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협상에 앞서 전쟁 범죄 책임자 처벌 논의가 먼저”라는 기존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트럼프, 중재자 역할 ‘포기할 명분’ 늘어
이스탄불에서의 협상 무산 조짐은 전선 밖에서 조율을 시도하는 인물들에게도 부정적 신호로 읽힌다. 대표적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간 “내가 잠시 물러나 있지 않았다면, 전쟁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발언을 반복하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외교 중재자로 나설 의지를 꾸준히 피력해 왔다. 하지만 협상 직전 우크라이나가 강도 높은 드론 공습을 단행하고, 러시아가 이를 명백한 도발로 규정하면서 중재의 명분 자체가 무너진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종전 촉구는 단순한 외교 관계 개입을 넘어 자신을 ‘강한 리더’로 부각할 수 있는 핵심 포지셔닝 수단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해 결과를 만들어내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섣불리 중재에 나섰다가 아무 성과 없이 돌아설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단 아예 애초에 관여하지 않는 쪽이 최선의 선택이란 분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마주한 국제 정세가 그를 방어해 주지 않는다는 점 또한 이 같은 분석에 힘을 더한다. 푸틴 대통령은 전쟁을 외교가 아닌 자존심의 문제로 다루고 있으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의 일방적 접근에 반감을 드러낸 바 있다. 여기에 개인 채널을 통해 개입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이나 북한 이슈도 연이어 진척이 없는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전략적으로 발을 들여놓을 공간 자체가 크게 줄어든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 포기는 정치적으로 불리한 게임을 피하는 계산된 철수로 해석할 수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협상 무산이 기정사실화한 국면에서 무리한 중재 시도는 ‘결과 없는 간섭’이란 평가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감각상 이런 리스크는 피하려 할 것이며, 이에 따라 향후 러·우 전쟁을 둘러싼 ‘트럼프 변수’ 또한 빠르게 약화할 것이란 게 외교계의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