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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부진·가격 하락 '이중고' 막대한 투자했지만 손실 불가피 글로벌 메이커 공장문 닫을 수도

글로벌 자동차업계가 앞으로 4년 동안 유례없는 수익성 악화에 직면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이 예상보다 길어지는 상황에서 중국 업체들이 본격적인 가격 인하에 나선 까닭이다. 수요 둔화와 채산성 악화가 맞물리는 만큼 상당수 업체가 공장 문을 닫을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1990~2010년 이어진 ‘반도체 치킨게임’이 자동차 시장에서 재연되는 모습이다.
세계 1위 BYD, 최대 34% 할인 등 재고 떨이
10일 자동차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미국 투자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최근 발간한 연례보고서 ‘자동차 전쟁(Car wars) 2025’에서 “2029년까지 전 세계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전례 없는 혼란을 겪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BoA는 첫 번째 이유로 전기차 수요 부진을 꼽았다. 상당수 메이커가 전기차가 대세가 되는 시점을 잘못 예측한 탓에 막대한 투자가 손실로 돌아올 가능성이 커져서다. 실제 포드는 지난해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양산 계획을 발표했지만 곧 백지화돼 시설투자비 19억 달러(약 2조5,000억원)를 손실 처리했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2021년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109.1% 늘었지만 지난해 상승률은 26.1%에 그쳤다. BoA는 “전기차에 관한 ‘헤드 페이크’(head fake·교란지표)가 업체들의 자동차 생산 계획에 혼란을 불렀다”며 “포드뿐 아니라 다른 업체도 전기차 투자 손실을 겪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불확실성이 커지자 중국 지리자동차는 당분간 신규 시설 투자를 중단하기로 했다. 리수푸 지리자동차 회장은 지난 7일 “세계 자동차 산업은 심각한 생산 과잉 상태”라며 “새 공장을 짓거나 기존 생산 시설을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전기차 바겐세일’도 위협 요소로 지목된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 전체가 치킨게임 양상으로 접어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세계 1위 전기차 제조업체 비야디(BYD)가 지난달 23일 22개 차종을 대상으로 최대 34% 할인 계획을 내놓자 지리자동차, 창안자동차 등도 ‘맞불 할인’에 들어갔다. 업계에선 중국이 부른 가격 인하 경쟁이 시차를 두고 미국·유럽 메이커로 확산할 것으로 예상한다. BYD가 지난해 1월 중국과 유럽 등에서 차값을 최대 15% 낮추자 테슬라도 10%가량 내렸다.
넘쳐나는 ‘제로 킬로미터 중고차’
업체들이 판매 목표 달성을 위해 '밀어내기 판매'에 치중하면서 중국 내에서는 ‘제로 킬로미터 중고차’도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제로 킬로미터 중고차는 신차를 판매된 것처럼 등록한 뒤, 주로 딜러나 제3자 플랫폼을 통해 재판매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차량은 실제로 주행거리가 거의 없지만 중고차로 분류돼 할인된 가격에 판매된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제로 킬러미터 중고차를 통해 제조업체는 이를 통해 판매 목표를 달성하고, 딜러들은 미판매 재고를 처리하며, 일부 경우에는 보조금이나 수출 정책의 혜택을 노리기도 한다. 올해 4월 기준으로 중국 내 승용차 재고는 350만 대에 달했다. 일부 제조업체는 생산 능력의 절반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제조업체들은 재고를 줄이기 위해 공격적인 판매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치열한 가격 경쟁과 신에너지차(NEV) 보조금 의존도가 높은 업계 특성은 이런 관행이 나타나기 쉬운 환경을 조성했다.
시장 분석가들은 이 같은 관행이 단순히 소비자 개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인위적으로 부풀려진 판매 데이터는 투자자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으며, 시장 수요를 왜곡하고 공정한 경쟁을 저해한다. 예컨대 BYD 친L 모델의 중고차 가격은 공식 가격보다 30~40% 낮게 형성돼 있으며, 이는 경쟁 모델 전반에도 가격 하락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시장 전반의 가격 기대치를 흔들고, 더 큰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보조금 끊기자 급격히 붕괴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난 배경에는 중국 자동차 산업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수년간 중국 정부의 전폭적 보조금 지원 아래 급성장했던 자동차 시장은 이제 무차별적인 출혈 경쟁과 과잉 생산, 자금난, 수출 차단이라는 4중고에 휘청이고 있다. 중국의 전기차 생산 능력은 이미 전 세계 수요를 한참 초과한 연 4,000만 대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2025년 전 세계 전기차 예상 판매량은 2,000만 대로, 중국 혼자서 두 배 이상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은 곧 그만큼 과잉설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실제 실질적인 내수 수요는 1,400만 대 수준으로 유럽과 미국, 인도 등 해외 주요 시장도 중국의 잉여 물량을 흡수하기엔 역부족이다. 과잉 설비는 현재 가동률 50% 이하라는 비정상적인 수치를 낳고 있으며, 수많은 공장이 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수익 구조다. 영업이익률은 대부분 붕괴 상태며, 니오는 -53%라는 충격적인 손실을 기록 중이다. 기업들의 재무상태가 급격히 악화되며 유통망 딜러들의 연쇄 폐업까지 벌어지고 있다.
결정타는 정부의 보조금 중단이었다. 중국 정부는 2023년을 기점으로 전기차 보조금 정책을 종료했는데, 이에 대한 업계의 준비는 거의 없었다. 이전까지 저금리 대출과 보조금으로 유지되던 공급 과잉 체제는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고, 기업들은 앞서 언급한 제로 킬로미터 중고차 판매와 같은 비정상적 방법까지 동원하며 재고 처분에 나서고 있다. 현재 중국 전기차 재고는 360만 대를 넘겼고, 이는 소비자 신뢰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제 사회의 관세 장벽도 중국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은 100%에 달하는 고율 관세를 적용하고 있으며, 유럽연합(EU)은 반덤핑 조사를 착수했다. 인도, 브라질, 튀르키예, 러시아 등 주요국은 자국 자동차 산업 보호를 위해 세금과 인증 장벽을 높이고 있다. 결국 중국 전기차는 해외로의 탈출구도 막힌 상황이며, 다시 내수 시장으로 돌아와 더욱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 같은 위기는 단순한 산업 붕괴를 넘어 1920년대 미국 자동차 산업의 과잉 투자와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당시 미국은 포드 모델T의 대성공 이후 수백 개 자동차 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무분별한 가격 경쟁과 과잉 생산 끝에 대공황과 함께 붕괴됐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기업은 GM과 포드 등 극소수였고, 나머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국도 지금 유사한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