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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금융업 수익성 한계 돌파구 절실
비금융 플랫폼 활용, 소비자 일상 침투
알뜰폰 유심 기반 데이터 확보 움직임도

가계대출 중심의 전통적 수익 모델이 흔들리면서 은행들이 디지털 플랫폼에 금융 서비스를 녹여 넣는 ‘임베디드 금융(Embedded Finance)’ 전략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커머스, SNS 등 소비자가 머무는 공간에 금융을 자연스럽게 배치하려는 시도로, 2030 젊은 세대에 어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전략으로 평가된다. 최근엔 알뜰폰 사업에 진출하는 은행들이 늘며 소비자 데이터 확보와 락인 효과를 동시에 노리는 확장 실험 또한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은행은 어디에나 있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전자상거래(이커머스) 플랫폼 SSG닷컴 내에서 자사의 금융 상품에 가입하고 은행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쓱KB은행’을 연내 출시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SSG닷컴 이용 고객을 대상으로 한 파킹 통장과 쇼핑 테마형 적금 상품도 선보일 예정이다. 이는 지난 4월 시작한 신세계그룹과의 제휴를 한층 강화하는 것으로, 국민은행은 당시 식음료 업체 스타벅스와 제휴 통장 ‘KB별별통장’을 출시한 바 있다.
스타벅스 애플리케이션(앱) 내에서 국민은행 계좌 간편 결제가 가능한 KB별별통장은 출시 한 달간 약 8만 계좌가 개설되면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특히 국민은행에서 취약 고객군으로 분류되는 40대 이하 여성의 비중이 약 80%에 달하는 등 은행 내부적으로도 고무돼 있단 전언이다. 지난해 국민은행이 저금리 시대를 앞두고 순이자마진(NIM) 방어를 위해 시작한 임베디드 금융 전략이 주효했단 평가다.
임베디드 금융은 은행의 금융 서비스를 비금융 기업의 플랫폼이나 서비스에 녹여서 제공하는 모델이다. 기존에는 은행 앱을 따로 실행해 송금하거나, 신용카드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결제를 진행했지만 이제는 커머스 앱 내에서 바로 대출을 받고 결제까지 끝낼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핵심은 사용자가 금융 서비스를 인식하지 못한 채 ‘배경 기능’처럼 활용한다는 데 있다. 이는 금융이 소비자의 일상 흐름 속에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랫폼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흐름이자, 금융의 물리적 영역 해체라고도 볼 수 있다.
최근 임베디드 금융이 주목받는 이유는 은행권의 구조적 위기와 맞물려 있다. 은행의 전통적 수익 모델은 가계대출과 이자수익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모델은 금리가 낮아지고 가계부채를 옥죄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여기에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MZ세대는 은행 앱보다는 커머스, 소셜미디어(SNS) 등 플랫폼 중심의 금융 접점을 원한다. 은행들이 자사 플랫폼에 소비자를 끌어오는 대신, 소비자가 머무는 플랫폼에 침투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 배경이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에선 이미 임베디드 금융이 일상화돼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아마존이다. 아마존은 BNPL(Buy Now, Pay Later) 서비스를 통해 결제는 물론 할부 금융까지 통합적으로 제공한다. 해당 서비스는 먼저 물건을 사고 나중에 값을 지불한다는 측면에서 신용카드와 비슷하지만, 별도의 카드 발급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많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 모빌리티 업체 우버도 자사 드라이버를 대상으로 대출·보험·예금 기능이 포함된 전용 앱을 제공하며 금융 플랫폼 역할을 수행 중이다.

단순 결제 기능 넘어 경험·연결성 강조
국내에서도 이미 소비자들의 일상 곳곳에 스며든 임베디드 금융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NH농협은행이 컬리페이와 협업해 추진 중인 제휴 통장이다. 컬리 사용자들은 해당 통장을 통해 별도의 계좌 이체 없이 간편 결제와 자동 충전 기능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NH농협은행은 지난 11일 컬리와 금융·유통 결합 혁신 서비스 제공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알리며 “앞으로도 플랫폼사, ERP 기업, 공공기관 등과 협업해 임베디드 금융을 지속해서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우리은행은 오픈API(응용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 플랫폼 이음(E:um)을 통해 다양한 기업들이 은행의 금융 서비스를 자체 플랫폼에 통합할 수 있도록 열어뒀다. 예컨대 온라인 쇼핑몰이나 앱 서비스 개발사가 해당 플랫폼을 활용하면, 계좌 조회나 자동이체 같은 기능을 자사 앱에 직접 임베딩할 수 있다. 이는 금융과 여타 서비스의 공생이 외부 플랫폼에 금융을 유기적으로 이식하는 구조로 전환되는 신호로 읽힌다. 금융사가 기술을 열어주는 방식으로 시장의 요구에 대응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제휴 모델은 플랫폼 입장에선 고객의 소비 패턴과 결제 이력 등을 실시간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또 은행은 이를 기반으로 정교한 마케팅과 대출 리스크 평가가 가능해진다. 구매 빈도나 충성도에 따라 맞춤 금융 상품을 제안하거나, 소액 후불 결제를 통한 BNPL 기능을 구현하는 식이다. 금융이 단순한 결제 도구를 넘어 데이터 기반의 고객 분석 도구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알뜰폰도 금융 플랫폼? 은행의 확장 실험
최근 시중은행과 인터넷은행이 잇따라 알뜰폰 사업에 뛰어드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겉보기엔 통신업과 금융회사의 연관성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 배경에는 ‘데이터와 고객’이라는 키워드가 숨어 있다. 알뜰폰은 본질적으로 소비자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기기의 통신을 책임지는 수단이다. 은행은 이를 활용해 지속적이고 밀착된 고객 접점을 확보할 수 있고, 나아가 금융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과 충성도도 함께 끌어올릴 수 있다.
시중은행 가운데선 KB국민은행이 가장 먼저 알뜰폰 사업에 나섰다. KB국민은행은 2019년 4월 제1호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돼 알뜰폰 브랜드 ‘KB리브엠’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은행은 LG유플러스와 손잡고 지난 4월 ‘우리WON모바일’을 출시했으며, NH농협은행은 요금제 추천 서비스 및 유심 판매로 알뜰폰 시장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케이뱅크는 KT와 손잡고 ‘케이유심’이라는 상품을 출시했고, 토스뱅크도 ‘토스모바일’을 통해 알뜰폰 시장에 진입했다.
이처럼 은행들이 앞다퉈 알뜰폰 사업에 뛰어드는 이유는 락인(Lock-in) 효과와도 관련이 깊다. 모바일 유심이라는 일상적이고도 필수적인 서비스를 통해 소비자 이탈 가능성을 낮추고, 금융 서비스 이용 빈도도 자연스럽게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저렴한 통신 요금과 연계된 금융 혜택이 인기를 끌면서 소비자의 생애주기 전체를 아우르는 금융 포지셔닝 또한 가능해지는 추세다. 금융이 더 이상 독립 산업이 아니라 통신·커머스·엔터 등 모든 산업을 융합하는 인프라가 되고 있다는 게 시장 전반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