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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바이오 기술 거래 0%→30% 항암제 임상 건수는 美 추월 美, 한 달 내 신약허가 카드로 대응

중국이 미국식 규제 시스템을 도입하며 바이오 산업 육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규제 완화와 심사 단축 등 속도를 무기로 글로벌 바이오 시장을 공략하는 모습이다. 미국을 추격하는 수준을 넘어 제도 혁신을 통해 바이오 패권을 잡겠다는 전략으로, 업계에서는 이 같은 중국의 행보가 글로벌 신약 개발 생태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글로벌 인공지능(AI) 산업과 같이 바이오 산업도 미국과 중국으로 양분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임상시험계획 심사 30일로 단축, 美 FDA 방식 도입
20일 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총국(NMPA)은 지난 16일 신약 임상시험 검토 대기기간을 현행 60일 이내에서 30일 이내로 단축하는 내용의 공고를 게시했다. 중국 정부 지원을 받는 임상적 가치가 뚜렷한 핵심 의약품과 NMPA 약물평가센터(CDE)가 감독하는 두 가지 프로젝트에 포함된 암 및 희귀질환 치료제 등이 적용 대상으로, NMPA는 내달 16일까지 한 달 동안 의견을 수렴한 뒤 이를 정식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미국식품의약국(FDA)과 유사한 심사 형태를 채택해 임상 속도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 바이오제약 전문지 피어스바이오텍에 따르면 중국은 임상시험 심사에 있어 FDA와 마찬가지로 의뢰자가 특정 기간 내에 규제 기관으로부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경우 임상시험이 자동으로 진행되는 이의 제기 기반(indented review)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번 정책이 시행되면 임상시험 처리 기간도 FDA와 동일하게 된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그랜드뷰리서치(Grand View Research)에 의하면 중국 바이오 시장 규모는 2023년 745억3,000만 달러(약 103조원)에서 2030년 2,652억 달러(약 364조원)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실제로 중국의 글로벌 제약사 대상 신약 기술 수출 비중은 10년 전 0%에서 지난해 30%로 늘었고, 항암 신약 개발 규모는 이미 미국·유럽을 앞질렀다. 글로벌 제약·바이오업계는 중국의 임상시험 규제 완화 조치가 글로벌 대형 제약사(빅파마)와의 투자나 기술 거래에 더욱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정부가 신약 개발에서 국제 기준을 받아들인 건 10년도 안 됐다. 2015년 들어 다국가 임상시험을 허용했고, 2017년에 국제의약품규제조화위원회(ICH)에 가입했다. 임상시험계획 심사도 6개월에서 1년까지 걸리다가 2018년에 60일로 크게 단축됐다. 이번에 중요 신약 관련 심사는 30일까지 줄인 것이다.
이 같은 정책 변화는 성과로 이어졌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딜포마(DealForma)에 따르면, 빅파마가 5,000만 달러(약 690억원) 이상 규모로 도입한 기술 중 29%가량이 중국 바이오 기업이 개발한 것으로 파악됐다. 2015년에는 이 수치가 3%에 불과했다. 중국 바이오 기업이 특히 강점을 보이는 분야는 항암제다. 지난해 기준 중국의 기술 거래 가운데 항암제 비중은 54%에 달한다. 전 세계 항암제 임상시험 중 중국이 진행 중인 비율은 2009년 2%에서 지난해 39%로 급증해 이미 미국(32%)과 유럽(20%)을 제쳤다.

中 정부의 바이오 굴기
글로벌 의약품 시장에서 각광을 받는 ADC(항체약물접합체) 치료제 시장에서도 중국 바이오기업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시장조사기관 글로벌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개발 중인 ADC 신약후보물질이 가장 많은 글로벌 기업 10곳 중 중국계 바이오텍은 5개로 절반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빅파마들이 여러 중국계 바이오텍의 ADC 후보물질을 도입하면서 기술이전 금액도 뛰고 있다. 지난해 12월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MS)는 중국계 바이오텍인 시스트이뮨의 이중항체 ADC 후보물질을 총 계약금 84억 달러(약 11조2,500억원)에 도입했다. 반환의무가 없는 선급금만 8억 달러(약 1조700억원)에 달한다. 단일 파이프라인 기준 ADC 분야에선 역대 최대규모 거래다.
중국의 바이오 굴기는 정부의 전폭적인 장려 정책 덕에 가능했다. 중국은 지난 2010년 바이오를 포함한 8개 산업을 '전략적 신흥산업'으로 정하고 세제 혜택을 주는 한편, 임상 시험 절차를 간소화하는 식의 규제 완화에 앞장섰다. 2015년부터는 ‘중국 제조 2025’, 2016년부터 ‘건강 중국 2030’ 등을 실시하며 국가 단위 바이오 산업 육성 전략을 수립하는 동시에 바이오 기업 역량을 증진하기 위한 세부 정책을 시행해 왔다.
美, 생물보안법·국가우선바우처 등 견제 강화
이를 토대로 미국 제약산업과의 격차도 크게 좁히고 있다. 현재 미국은 여전히 중국 바이오 기업과의 거래를 제한하는 생물보안법을 추진하면서도, 속도 경쟁에 맞서며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중국이 임상시험계획 심사 단축을 발표한 지 하루 지난 17일, FDA는 ‘국가우선바우처(CNPV)’ 제도 카드를 꺼냈다. 미국에 생산시설을 갖췄거나,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기업에는 최종 신약허가신청(NDA) 심사 기간을 기존 10~12개월에서 1~2개월로 단축하는 내용이 골자다. FDA 내부 전문가들이 하루 동안 집중 회의를 통해 판단을 내리는 방식으로, 제약사에 있어선 강력한 인센티브다.
지난 4월에는 미국 상원 위원회가 미국인들의 생체 정보를 중국이 입수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중국이 미국인 바이오 데이터를 분석해 미국인에게 특히 효능 있는 신약을 개발하면, 코로나19 팬데믹 때 세계가 백신 개발 국가에 매달렸던 것처럼 미국의 바이오 주권이 중국에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위원회는 “중국은 20년간 바이오 테크를 전략적 우선순위에 두면서 빠르게 우위를 점하고 있다”며 “신속히 대응하지 않으면 중국에 뒤처져 앞으로 회복이 불가능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 최대 제약 강국 미국이 중국 기업을 견제하는 이유는 최근 중국 바이오기업의 성과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유전체 분석 전문기업인 BGI는 2012년 미국 컴플리트 지노믹스(CGI)를 인수하며 미국 시장에 진출해 일루미나, 써모피셔 등 미국 기업이 사실상 과점해 온 유전체 분석 장비 시장 지형에 균열을 일으켰다.
또한 중국은 세계 제약업계가 눈독 들이는 신약 후보 물질뿐 아니라 신약의 화학 구조를 일부만 변경해 새로 출시하는 이른바 ‘수퍼 미투(super-me-too) 신약’도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이는 중국 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통해 임상 시험 절차를 간소화하고, 많은 인구로 임상 시험을 빠르게 진행함으로써 신약 개발 기간을 대폭 단축해 경쟁력을 끌어올린 결과로 분석된다. 글로벌 제약업계에선 “앞으로 10년 안에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할 신약의 상당수가 중국 실험실에서 나올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게다가 중국은 완제 의약품을 만드는 데 필수인 원료의약품 시장도 장악하고 있다. 원료의약품은 최종 의약품의 효능을 좌우하는 핵심 성분으로 꼽힌다. 특히 항생제 부문의 원료의약품에서 중국은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다. 원료의약품(API)의 반(半)제품 상태인 API 중간체 시장에서도 중국의 비중이 크다. 바이오 시장분석기관에 따르면 유럽에서 쓰이는 API 중간체의 70%는 중국산이다. 업계에서는 올해 중국의 원료의약품 매출이 159억7,000만 달러(약 22조7,000억원)에 달하고, 2030년까지 연평균 7.86%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