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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소화 어려워’ 관측 무너지나
SK엔무브 상장 실패 후폭풍
그룹 내 자금 동원 여력도 바닥

SK이노베이션이 5조원 규모의 LNG 밸류체인 유동화에 나섰다. 자회사인 SK엔무브 기업공개(IPO) 실패와 지분 재매입 부담이 겹치면서 결국 미래 수익까지 끌어다 쓰는 방식으로 자금 조달에 나선 것이다. 단독 인수자로는 메리츠증권이 유력한 가운데, 금리는 6%대에서 조율 중이다. 업계에서는 SK 그룹이 이번 유동화로 단기 숨통을 트일 것으로 내다보면서도 이후 알짜 자산 매각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놨다.
정기 수익 흐름 기초 자산 유동화
26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LNG 발전 사업에 대한 자산 유동화증권(ABS) 발행 조건으로 최대 6%대 수익률을 투자자들에게 제안했다. 앞서 SK이노베이션은 E&S 사업부 내 나래에너지서비스, 여주에너지서비스 등 LNG 발전소 자산을 유동화해 4~5조원 가량의 자금을 확보하겠단 목표를 제시한 바 있으며, 이달 30일로 예비 입찰일을 확정하고 복수의 투자자들과 접촉해 왔다.
시장에서는 당초 이 같은 규모의 유동화를 국내 기관이 단독으로 소화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LNG 계약은 통상 수년 이상 장기 계약으로 이뤄지는 데다, 수입부터 재가공 및 판매에 이르는 복잡한 밸류체인을 포함해 구조화가 까다로운 자산으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의 접근 가능성이 매우 우세한 것으로 점쳐졌다. 그러나 KKR, 브룩필드 등 외국계 사모펀드가 환율 등을 이유로 최소 9% 이상의 수익률을 요구하며 협상이 사실상 결렬됐단 전언이다.
현재 유력한 수주 대상으로는 메리츠증권이 거론된다. 메리츠는 지난해 홈플러스에 담보 대출을 내주면서 최소 8% 이상의 고금리를 제시했지만, 이번엔 SK 측이 제시한 5~6%대 금리를 수용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에 자금조달 여력이 부족했던 SK이노베이션과 정통 IB 업무 진출을 타진해 온 메리츠의 필요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상생 전략이 될 것이란 게 시장 참여자들의 주된 시각이다.

엔무브 지분 매입에 8,500억원 필요
애초 SK이노베이션은 윤활유 자회사 SK엔무브를 상장시켜 수천억원대의 자금을 조달하고, 이를 통해 SK온에 필요한 신규 자본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엔무브는 높은 수익성과 현금창출력으로 IPO 시장에서도 흥행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지만, 2023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자본시장 불안정성과 글로벌 경기 위축, 반도체·배터리업종의 실적 저하 등이 겹치며 상장 일정이 계속 미뤄졌다. 결국 SK이노가 기대하던 핵심 자금조달 수단도 무산됐다.
이 과정에서 SK이노베이션은 기존에 보유하던 SK엔무브 지분을 외부에 매각하기보단 전량 유지하는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에코솔루션홀딩스가 보유하고 있는 SK엔무브 주식 전량인 1,200만 주를 주당 7만1,605원에 매입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투입되는 자금은 8,592억원에 달한다. 에코솔루션홀딩스는 IMM크레딧솔루션이 SK엔무브 지분 투자를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이다.
결과적으로 SK이노베이션은 기대했던 외부자금 유입을 놓치게 된 것은 물론 향후 경영 전략 수정 또한 불가피해졌다. 특히 SK온에 대해서는 가뜩이나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서 수익성 악화와 경쟁 심화로 추가 투자금이 절실한 상황에서 엔무브 상장 실패로 모든 지원 방안이 틀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따라 LNG 자산을 유동화하는 이번 딜은 사실상 마지막 카드라는 관측까지 제기되는 실정이다.
유동화는 마지막 카드, 남은 건 매각뿐
업계에서도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 지원 여력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관측이 주를 이룬다. 그간 SK이노베이션은 석유정제와 화학, 윤활유 등 전통 에너지 사업을 영위하며 SK온을 포함한 신사업 투자를 병행해 왔다. 그러나 SK온에 대한 투자가 막대하게 불어나면서 SK이노베이션의 순차입금 규모는 지난해 약 31조원으로 전년 대비 약 9조원 증가했다. 이 가운데 약 20조원이 SK온 연결부문의 차입금으로, SK온에 대한 투자 부담이 전체 부채 증가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모채 시장의 문도 쉽게 두드리지 못하고 있다. SK온은 업황 불안에 따른 실적 악화에 공모 시장에서 부진한 평가를 받는 대신 사모채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SK온이 올해 사모채 시장에서 조달한 금액은 총 1,200억원으로, 3차례에 걸쳐 단기 운영자금을 끌어모았다. 발행된 사모채는 모두 3년 만기에 금리는 4%대 초반이다. 사모채는 통상 3년물, 5년물, 10년물로 발행되는 공모채와 비교해 금리가 높고 상환 기간도 짧다.
차입금이 늘어나면서 SK온의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도 제기된다. SK온의 부채비율은 2023년 190%에서 지난해 2024년 198%, 올해 1분기 251%로 꾸준히 증가했다. 통상 시장에서는 부채비율이 200%를 넘어가면 관리가 필요하다고 평가한다. 순차입금 규모 역시 2022년 약 16조원에서 지난해 말 약 20조원으로 뛰었다.
이에 업계에선 중장기적으로 그룹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기 위해 매물로 나와 있는 SK 계열사들의 매각 작업에 속도가 날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SK는 그룹 차원의 유동성 확보를 위해 SK실트론, SK에코플랜트 환경사업부(리뉴어스·리뉴원), SK오션플랜트 등 매각을 추진 중이지만, 이렇다 할 원매자를 찾지 못해 매각이 지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