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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 가비 지원 중단 "억만장자 손에 세계 보건 전략 놀아나고 있다" 주장해 저소득 국가 '보건 공백' 확대 우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제 백신 연합체 가비(Gavi)에 대한 지원을 전격 중단했다. 가비가 개인의 자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공공성을 잃었다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케네디 주니어 장관의 이 같은 결정이 글로벌 보건 공백을 키우고, 미국 내에서 반과학적 정서를 확산시킬 위험이 크다는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가비 지원 중단의 후폭풍
23일 의료계에 따르면, 케네디 주니어 장관은 지난달 가비에 대한 미국 연방 정부의 지원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최근에는 외신 인터뷰를 통해 “가비는 공공 보건 조직이라기보다 기업 조직처럼 운영된다”며 지원 중단 조치가 투명성과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케네디 주니어 장관의 강경책을 접한 의료계는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가비의 핵심 지원국 중 하나인 미국의 이탈은 전 세계 공중보건 인프라 전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가비는 설립 이후 10억 명 이상의 아동에게 예방 접종을 지원한 국제 연합체로, 전 세계 70개국 이상에서 홍역, 소아마비, 황열 등 백신 예방 질환 퇴치를 위해 움직여 왔다. 미국의 금전적 지원이 끊기면 가비 전체의 운영 안정성이 위태로워지며 글로벌 보건 공백이 급격히 확대될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백신 예방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가 다수 발생하는 저소득 국가의 경우, 가비의 지원 체계 붕괴로 인해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국제 구호 단체 메디컬팀즈 인터내셔널은 “가비의 공급망에 차질이 생기면 수백만 명의 아동이 기초 접종을 받지 못할 수 있다”며 치명적 전염병의 재확산 위험을 경고하기도 했다.

발언권 얻은 '백신 회의론자'
가비에 대한 케네디 주니어 장관의 비판적 견해는 그가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백신 회의론'에서 기인한다. 그는 이전부터 어린이의 백신 접종 횟수, 백신 안전성 임상 시험의 타당성 등에 의구심을 품고, 의료계·제약업계에 끊임없이 비판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대다수 과학자는 케네디 주니어 장관의 주장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동료 평가(peer review)를 거친 근거 자료를 거의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제 케네디 주니어 장관이 단순한 '회의론자'가 아닌 확실한 발언권을 가진 정책 결정자라는 점이다. 백신에 대한 그의 관점이 정책에 직접 반영되며, 전 세계 취약 계층에 실질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다. 지난 4월 그가 노바백스 백신에 대한 부정적 발언을 내놓은 뒤 시장에 나타난 변화를 살펴보면 그의 발언이 지닌 파급력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케네디 장관은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노바백스의 코로나19 백신을 언급하며 “단일 항원 기반 백신은 호흡기 질환에서 단 한 번도 효과를 입증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FDA의 노바백스 승인 지연 이유에 대해서는 “해당 백신의 구성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일갈했다. 노바백스는 2022년부터 긴급사용승인(EUA)에 따라 백신을 공급해 왔으며, 이후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정식 승인을 신청했다. 그러나 FDA는 예정된 승인 결정 시점을 넘긴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노바백스 백신에 승인을 내주지 않고 있다. 케네디 주니어 장관의 이 같은 발언 직후 노바백스 주가는 하루 만에 20% 가까이 하락했고, 또다른 백신 제조사인 모더나와 화이자의 주가도 각각 8%, 4% 하락 마감했다.
美서 가비 비판 여론 형성돼
케네디 주니어 장관의 '가비 회의론' 역시 백신 회의론과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에서 막대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그는 가비가 억만장자 기부자, 특히 빌 게이츠의 영향력 아래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은 가비의 최대 민간 기부처이며, 게이츠는 지난 20년간 전 세계 백신 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케네디 주니어 장관 측은 한 개인이 세계 보건 전략을 좌우하는 현 상황이 사실상 윤리적인 '선'을 넘었다고 본다.
그의 주장은 대형 재단과 해외 원조에 회의적인 미국인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 이들은 가비의 공공-민간 협력 모델 자체에 구조적 결함이 있다고 본다. 가비의 운영 구조가 특권층의 의제에 종속돼 있고, 민주적 통제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국 정부가 자국 내 구조적 문제를 방치한 채 해외 지원에 예산을 쏟아붓는 것이 문제라는 불만도 제기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원 재배분이지, 지원 연장은 아니라는 시각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들의 시각이 지나치게 협소하다고 반박한다. 가비는 게이츠만의 조직이 아니며, 세계보건기구(WHO), 유니세프, 세계은행, 각국 정부 등이 함께 참여하는 국제 연합체이기 때문이다. 가비의 활동이 아동 사망률과 감염병 부담을 현저히 줄인다는 과학적 근거 역시 이 같은 견해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