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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B·IMF 등 주요 기구, 0%대 성장률 전망 한은, 기존 성장률 전망치 낮춰 0.8% 제시 생산성 혁신 없이는 2040년 역성장 가능성

국내외 기관들이 올해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잇달아 1% 아래로 낮추면서 0%대 성장률이 현실화하는 분위기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등 일시적인 충격이 있었던 시기를 제외하면 27년 만에 0%대 성장률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올해의 부진이 단기 침체가 아니라, 구조적인 생산성 저하와 고령화 등 경제 전반의 체력 약화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특히 혁신의 ‘질’ 저하와 산업 전반의 효율성 정체가 맞물리며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근본적으로 갉아먹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27년 만에 최악의 경제 성적표
23일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올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0.8%로 전망했다. 이는 국내외 주요 전망 기관의 관측과 궤를 같이한다. 앞서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들은 한국이 1% 성장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고,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올해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0.8%로 하향 조정했다. 정부는 올해 초 우리 경제가 1.8%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조만간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며 성장률 전망치를 0%대로 하향 조정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경제가 1% 미만의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1980년 2차 오일쇼크(-1.7%), 1998년 IMF 외환위기(-5.1%),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0.7%),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0.7%) 등 단 네 차례뿐이다. 이 가운데 2009년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가 비교적 선방한 해였고, 2020년은 바이러스 쇼크로 전 세계 경제가 동반 역성장을 겪은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면, 예측대로 한국이 0%대 성장에 그칠 경우 1998년 이후 27년 만에 가장 충격적인 경제 성적표를 받게 되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일시적인 침체를 넘어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체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경기 둔화를 넘어 구조적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경고로 해석된다. KDI는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2030부터 연평균 0%대로 떨어질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생산성 증가율(연 0.6%)을 유지하는 시나리오에서는 2030년까지 1.5%, 2031∼2040년 0.7%, 2041∼2050년 0.1%로 하락하지만, 생산성 증가율이 연 0.3%로 떨어지면 잠재성장률은 2030년대 0.4%, 2040년대 -0.3%까지 하락해 역성장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초저출산·생산인구 감소 극복하려면 혁신 필요해
이처럼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진 배경에는 초저출산과 고령화, 생산성 하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은 경제연구원은 '연구·개발(R&D) 세계 2위 우리나라, 생산성은 제자리'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출산율의 극적 반등, 생산성의 대폭적인 개선 등 획기적 변화가 없다면 한국 경제가 2040년대 마이너스 성장 국면에 진입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 중 심각한 문제는 총인구(통계청 장래인구추계 기준)가 2020년 5,184만 명을 정점으로 2040년 5,006만 명, 2070년 3,718만 명까지 줄어든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은은 급격한 고령화와 생산인구 감소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경제 전반의 혁신이 필요한 데 현재 수준에서는 이마저도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2022년 기준 GDP의 4.1%로 세계 2위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 내 특허출원 건수도 2020년 기준 국가별 비중에서 7.6%를 기록하며 4위에 올라 투입·산출 양면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한은 분석 결과, 국내 기업의 생산성 증가율은 2001∼2010년 연평균 6.1%에서 2011∼2020년 0.5%로 10년 새 급격히 둔화됐다.
생산성이 둔화한 주된 이유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혁신의 양은 확대됐지만, 질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기업 주도로 전체 R&D 지출과 특허출원 건수가 크게 늘었지만, 생산성과 직결된 특허 피인용 건수 등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눈에 띄게 감소해 이전 추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기업이 혁신의 질이 떨어진 데는 기초연구 지출 축소의 영향이 크다. 글로벌 기업이 선도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기초연구 투자를 늘려가고 있지만, 국내 기업의 기초연구 지출 비중은 2010년 14%에서 2021년 11%로 오히려 감소했다.
중소기업의 생산성 둔화도 눈에 띤다. 자금 조달의 어려움과 혁신 신생기업의 시장 진입 감소가 겹치며, 2010년대 이전까지 상승세였던 생산성도 정체됐다. 특히 2010년대 들어 벤처캐피털(VC)에 대한 접근성 악화는 중소기업의 혁신 자금 조달난으로 이어졌다. 국가·기업 패널 분석 결과를 보면 VC 접근성이 좋고 인수합병(M&A)이나 기업공개(IPO) 등 투자 회수 시장이 발달할수록 혁신 실적이 좋아지지만, 한국은 이 두 가지가 모두 저조하다. 게다가 ‘창조적 파괴’를 이끌 혁신 창업가의 부족은 유망한 신생기업의 시장 진입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제조업뿐 아니라 서비스업도 '생산성 둔화'에 직면
생산성 저하는 단지 R&D 등 기술개발과 밀접한 제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내 서비스업에서도 구조적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한은이 발표한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 평가 및 정책적 대응 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민간 서비스 산업의 1인당 노동생산성은 제조업의 39.7% 수준에 불과하다. 2005년 이후 20여 년간 제조업 생산성의 40% 수준에서 정체돼 있는 셈이다. 양적으로는 지난해 기준 명목 GDP의 44%, 취업자 수의 65%를 차지할 만큼 성장했지만, 질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부진한 모습이다.
해외 주요국과 비교해도 한국의 서비스업 생산성은 낮은 수준이다. 제조업 중심 국가인 일본과 독일과 비교하더라도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유독 뒤처진다. 2021년 기준 미국의 서비스업 생산성을 100으로 가정했을 때, 한국은 51.1로 절반 수준에 그쳤다. OECD 평균 59.9보다 낮고, 독일(59.2)과 일본(56)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국내 서비스 산업이 오랜 기간 제조업의 생산과 수출을 지원하는 보완적 역할에 머무르면서 독립적인 수요 기반을 만들지 못한 게 생산성 저하의 원인 중 하나"라고 짚었다.
생산성 향상의 동력이 돼야 할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조차 '반짝 성장'에 그쳤다. 특히 금융·보험, 정보·통신 분야의 국내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은 내수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 예컨대 지식서비스업의 경우, 2021년 기준 총매출의 98%가 내수에 집중돼 있고, 해외 진출 경험이 있는 기업 비중도 2.2%에 불과했다. 반면 미국은 팬데믹 이후 고기술 서비스업 분야에서 스타트업 창업이 활발하게 이뤄지며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났다. 인공지능(AI) 붐에 힘입어 급증한 글로벌 IT 수요를 흡수하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한 것이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부진한 상황에서 음식·숙박업, 도·소매업 등 저부가가치 서비스업에서는 생계형 자영업자의 과잉 진입과 잦는 퇴출이 반복되며 회전문식 경쟁과 영세성이 고착화하고 있다. 지난해 자영업자의 60%가 저부가 서비스업에 종사했고, 이 중 73%가 1인 영업 형태의 영세 자영업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한은은 “노동시장 구조 혁신과 중소기업의 법인화·직영 프랜차이즈 확산 등을 통해 생계형·비자발적 자영업자들이 중견 이상 규모의 기업 일자리로 이동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