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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서태평양 질서 유지에 초점
美 의회도 상시 전력 필요성 강조
한국 외교·안보 정책 중대 분기점

지난해 말 부임한 주한미군사령관이 병력 규모보다 임무 수행 능력을 우선해야 한다며 미군의 주둔 목적 변화를 시사했다. 미 의회가 주한미군 규모 유지 법안을 통과시켜 단기간 감축 가능성을 차단한 가운데, 주한미군의 핵심 임무를 북한 억제에서 중국 견제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한 것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미국의 대만해협 위기 대응과 인도·태평양 전략 재편이 한미 안보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관측을 내놨다.
“군사력 다른 방식으로 운용, 더 나은 방어 가능”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지난 8일 경기 평택 캠프험프리스 기지에서 열린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주한미군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나는 숫자가 아니라 능력에 대해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는 현재 2만8,500명 규모의 주한미군 일부를 역외 재배치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는 F-35를 비롯한 미국 공군 5세대 전투기를 6개월 전부터 한국에 배치한 사실을 전하며 “지금까지의 군사력을 다른 방식으로 운용할 때 더 나은 방어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브런슨 사령관은 과거 중동으로 재배치했던 패트리엇 포대를 사례로 들어 시간·공간·필요에 따라 전력을 이동시키는 ‘전략적 유연성’ 개념을 설명했다. 그는 “과거 한반도 내에서 수행한 훈련 덕에 가장 높은 준비 태세를 갖췄던 패트리엇 포대를 중동으로 재배치할 수 있었다”며 “그때처럼 우리 전력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돼 있는지 총체적으로 보고, 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용 방안을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은 복합적인 안보 위협에 대응하는 전략 구도에서 나왔다. 이날 브런슨 사령관은 북한을 ‘핵무장한 적대세력’으로 지칭하면서도 러시아의 역내 관여 확대, 중국의 서해 군사 활동 강화를 주요 위협으로 언급했다. 그는 중국의 서해 시설물 설치와 군사훈련 확대가 남중국해에서의 행태와 유사하다고 지적하며 이를 감시·표적화할 수 있는 능력을 한미동맹이 보유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다만 이번 발언이 즉각적인 병력 재배치로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브런슨 사령관은 인력 감축 시점이나 수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며, 전작권 전환 역시 합의된 조건을 충족해야 가능하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무리한 조기 전환은 한반도 전력의 준비태세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맥락에서 브런슨 사령관의 발언은 주한미군의 병력 규모 조정보다는 주둔 목적과 전력 운용 방식의 변화를 인정한 사례로 평가된다. 한미 군사 동맹의 전략 목표가 북한 억제에서 중국 견제·지역 질서 유지라는 더 넓은 시야로 확대됐다는 의미다.
미 의회는 주한미군 규모 유지 명문화
미국 연방 의회 역시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에 제동을 걸고 현 수준 유지를 법안으로 명문화했다. 하원 군사위원회는 지난달 15일(이하 현지시각) 약 2만8,500명의 주한미군 주둔을 유지하는 내용을 담은 2026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 수정안을 가결했다. 수정안을 발의한 조 윌슨 하원의원은 인도·태평양 지역 동맹 강화를 위한 국방부의 지속적 노력을 법안에 반영하면서 한반도 주둔 미군 규모 유지와 확장억제 약속 재확인을 명시했다. 이는 지난해 제정된 2025회계연도 NDAA의 문구와 동일하며, 트럼프 행정부의 감축 가능성 논란 속에 현상 유지를 재차 못 박은 것이다.
이에 앞선 지난달 11일 상원 군사위 역시 유사한 내용의 법안을 26대 1로 가결했다. 상원안에는 미 국방부 장관이 주한미군 태세 축소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의회에 보증하기 전까지 전력 축소를 금지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합참의장과 인도·태평양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이 감축이나 전작권 전환에 따른 위험성을 독립적으로 평가하도록 한 점도 특징이다.
이러한 규정은 자국 행정부가 독자적으로 주한미군 규모를 축소하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2019회계연도 법안에서 처음 도입된 감축 제한 조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1기 집권 시절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견제하기 위해 추진됐으며, 이후 2022회계연도 법안부터는 ‘현 수준 유지’ 문구로 전환됐다. 이후 3년 만에 제한 조항이 부활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 협의 없이 병력을 줄일 수 있다는 우려가 재점화된 결과인 셈이다.
실제 지난 5월에는 미 국방부가 주한미군 4,500여 명을 괌 등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재배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미 국방부와 주한미군은 해당 보도를 극구 부인했지만, 의회는 잠재적 감축 시도를 법률로 차단하며 대응 수위를 높였다. 이번 상·하원 통과로 주한미군 병력 유지가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되면서 단기간 내 감축 가능성은 사실상 차단된 상황이다.

작전 범위 인도·태평양 전역으로 확대
이런 가운데 미국은 주한미군의 핵심 임무를 북한 억제에서 중국 견제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미 국무부는 지난달 24일 한국과 ‘동맹 현대화’ 협의를 시작한다고 밝히며 “한반도에서 미군과 한국군의 역할과 책임을 재조정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주한미군을 대북 전력에서 대중국 전력으로 변화시키자는 제안이 고위 외교 채널을 통해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작전 범위를 인도·태평양 전역으로 확대한다는 게 미 국무부의 구상이다.
주한미군 임무 재편 논의의 핵심 배경은 중국의 군사력 확장과 그에 따른 대만해협 긴장 고조다. 최근 수년간 중국은 대만 주변에서 군사훈련을 확대하며 갈수록 무력시위 수위를 높여 왔으며, 미국은 이를 역내 안보 질서를 위협하는 최대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지난 3월 말 공개한 ‘임시 국가방위전략 지침’에서 중국의 대만 침공 저지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으며, 이달 발표될 국방전략(NDS)에도 이를 대비한 미군 재편 계획을 담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경제·통상 이슈와 안보가 연계되는 정황도 포착됐다. 워싱턴포스트(WP)가 공개한 미 정부 내부 문서에 의하면 트럼프 행정부는 한미 관세 협상 당시 한국에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즉 대중국 억제를 위한 활동 반경 확대에 동의하라는 요구를 검토했다. 초기 협상안에는 한국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3.8%로 증액하고, 방위비 분담금도 현재의 9배 수준으로 올리라는 조건이 포함됐다. 이는 관세 인하의 반대급부로 안보적 양보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동맹 현대화 논의의 하위 의제로 주한미군 역할 조정이 다뤄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재편이 지난 70여 년간 유지된 한미 안보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들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중국 견제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면, 한국은 미·중 전략 경쟁의 전면에 서게 될 것이란 이유에서다. 국민들이 이를 수용할지 불확실한 데다, 동맹 이견이 발생할 경우엔 외교·경제 전반에도 연쇄적 영향을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나아가 트럼프 행정부가 서태평양 반중 전선 참여 여부를 한국의 ‘우군 여부’ 판단 기준으로 삼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주한미군의 임무 재편은 한미 정상 간 신뢰 회복과 직결되는 것은 물론, 한국 외교·안보 정책의 중대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