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러 제재가 위안화 국제화 기폭제로” 러시아 극동, 위안화 결제 95%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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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무역·금융 거래서 위안화 비중 확대 중국의 자원 투자와 금융 지원에 따른 의존성 심화 아시아 금융 질서 다극화 및 달러 패권 균열 가속 전망

러시아에서 중국 위안화의 지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러시아의 대외 무역 결제는 물론, 현지 은행과 외환시장에서까지 위안화가 사실상 지배적 통화로 자리 잡으며, 실물경제를 토대로 한 지역 기축통화의 위상을 굳히는 양상이다. 이는 양국의 에너지·자원 거래와 중국의 대규모 투자, 국제 금융 인프라의 재편 등이 맞물린 결과로, 아시아 금융 질서의 다극화와 달러 패권의 균열을 가속할 변곡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러시아 내 위안화 수요 급증
1일 미국의 중국 전문 매체 에포크타임스에 따르면 중국 국경 근처인 러시아 극동에서 중국과 러시아 간 무역에서 위안화로 결제되는 비중이 급증하는 등 중국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 기준 중러 무역의 95% 이상이 위안화나 루블로 결제되고 있으며, 러시아 현물 시장 총 매출액에서도 중국 통화 점유율은 40%에 달한다. 이 수치는 전체 무역량이 상반기 1,064억8,000만 달러(약 148조3,000억원)로 9% 감소했음에도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러시아 시중 은행에서의 위안화에 대한 수요도 크게 증가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에 따르면 러시아 주요 은행인 VTB에서 비현금성 위안화가 은행 앱으로 구매하는 가장 인기 있는 외국 통화로 파악됐다. VTB은행 측은 2022년 3분기에 위안화 구매가 전분기 대비 10배 가량이나 성장했고, 올해 기준 비현금성 외국 통화 구매 중 위안화 구매는 80%를 넘어섰다고 설명했다.
위안화 계좌 오픈 수요도 대폭 늘었다. 올해 초 기준 VTB은행에서는 40억 위안(약 7,820억원) 상당의 입금 계좌가 오픈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러시아 주요 은행인 MKB은행에서도 개인을 위한 위안화 저축 상품이 출시됐고, 알파은행에서는 프리미엄 고객들을 위한 위안화 예금 상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상태다. 일부 은행들은 현금으로 위안화 인출 서비스도 제공하는데, PSB은행은 위안화 현금 인출이 큰 규모는 아니지만 주로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을 중심으로 수요가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러시아 외환 거래에서도 위안화가 시장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인 러시아은행(Bank of Russia)의 금융 리스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러시아 주요 거래소에서 위안화 거래 비중은 99.6%를 차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역대 최고치다. 모스크바 거래소에 의하면 위안화가 달러를 제치고 거래소 월 거래량 최대 통화로 처음 등극한 건 2023년으로, 러시아에서 달러와 유로화 등 외국 통화의 지위는 하락한 반면 위안화는 환영받는 통화 중 하나가 된 모양새다.

서방의 대러 제재, 위안화 위상 제고에 일조
이 같은 흐름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가 시작된 후부터 눈에 띄게 나타났다. 서방의 경제 제재는 달러·유로 중심의 국제 결제망을 붕괴시키며 사실상 위안화의 국제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러시아 금융기관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배제된 이후, 중국이 자체 개발한 국제위안화지급시스템(CIPS)이 대체 수단으로 부상한 사실이 대표적 예다. 중국 궈렌증권에 따르면 서방의 제재는 러시아의 CIPS 시스템 사용을 부추겨 위안화의 국제화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이는 향후 중국의 금융 분야 데이터베이스(DB)의 국산화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엔 중국 정부의 대러시아 투자가 주효하게 작용했다. 중국은 지난 2023년 러시아 극동 지방에 1,600억 달러(약 223조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했다. 극동 지역은 석유와 가스, 석탄, 목재 등 광물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러시아 정부가 중국에 문을 연 초대형 경제특구의 규모는 러시아 전체 영토의 40%에 해당한다. 이 같은 중국의 대대적인 러시아 투자는 광물 에너지와 인프라 건설, 농업, 자동차 제조업 등 총 79개 주요 프로젝트에 대한 양국 간의 협력을 골자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중국 은행들은 러시아 은행에 수십억 달러 규모의 대출도 제공했다. 서구 은행들이 철수하면서 대출 연장이 어려워지자 중국 은행들이 흔쾌히 SOS에 나선 것이다.
이 같은 투자는 위안화를 통한 원유 거래로 이어졌다. 지난 수년간 중국과 러시아 모두 에너지 거래에서 달러 의존도를 줄이려고 시도해 왔다. 특히 중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석유 거래에서도 위안화 결제를 허용하는 방안을 협의하는 등 미국이 사우디와 수십 년간 구축해 온 '페트로달러' 무너뜨리기에도 혈안이 돼 있었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서방의 단결은 위안화 국제화를 이루는 데 촉매제가 됐다. 이는 중국의 장기 전략에도 부합한다. 러시아 극동 지역은 미국 해군력이 공급을 차단할 수 있는 말라카해협 같은 해상 취약성을 우회해 석유, 가스, 금속 등 육로 공급망을 확보할 수 있는 대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러, ‘사할린 투자’ 日 기업에 위안화 배당도
더욱 주목되는 부분은 러시아가 극동 에너지 개발 사업인 사할린 프로젝트에 투자한 일본 기업에 달러 대신 위안화로 배당금을 지급한 사실이다. 지난 2022년 러시아 정부는 극동 에너지 개발 사업인 사할린 1·2호 유전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 수익 등을 관리하는 회사를 신설하고 기존의 배당금 지급 방식을 바꿨다. 서방 제재 이전까지 사할린 프로젝트 배당금은 싱가포르 계좌를 통해 연간 2회가량 달러로 송금됐지만, 러시아가 달러 결제망에서 배제된 후 사할린 프로젝트에 대한 달러 결제망 사용은 불가능해졌다.
이에 러시아 금융당국은 사할린 프로젝트에서 발생한 배당금을 지급하기 위해 2023년 초 새로운 송금 경로를 만들고 지급 통화를 달러화에서 위안화로 변경했고, 해당 계좌를 통해 사할린 프로젝트에 출자했던 미쓰이물산과 미쓰비시상사 등에 100억 엔(약 948억원) 규모 배당금이 위안화로 지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달러 결제망 배제로 위안화가 대안이 된 셈이다.
이런 양상을 두고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사실상 위안화 국제화의 실험장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중국 은행들은 미국의 2차 제재 위협을 핑계로 러시아와의 거래에 있어 필요할 때는 결제를 지연시킬 수도 있어서다. 또한 양자 무역의 대부분이 위안화로 이뤄지면서 일대일로(一帶一路,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 파트너들의 모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의존성 확대는 중국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져 공식 주권을 보존하면서도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했다.
위안화의 영향력이 러시아를 넘어 아시아 주요 경제권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미얀마 정부는 위안화 사용을 확대하는 ‘탈(脫)달러화’ 전략을 채택하고 지난 2023년 행정공지를 통해 이를 구체화했다. 이에 따라 무세(Muse), 르웨제(Lwejel), 친쉐호(Chin Shwehaw), 깐삐띠(Kanpitetee), 짜인통(Kyaing Tong) 등 중국으로 연결된 모든 국경게이트에서 위안화 사용이 강제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위안화는 보조적 결제 수단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아시아에서 달러와 엔화를 대체할 수 있는 통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흐름이 단순한 금융 기술적 현상이 아니라, 실물경제가 위안화의 국제화를 떠받치는 기반이 됐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몇 년 내 아시아 지역에서 위안화가 엔화를 추월해 지역 기축통화로 안착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 달러 패권의 유라시아 축이 균열되고, 위안화가 글로벌 통화체계의 다극화를 선도하는 전환점으로 작용할 것이란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