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태그플레이션 공포에 인도 초고율 관세까지” 美 기업들, 中 탈출 대신 ‘잔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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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에 '마비'된 기업들 투자 이전 결단 어려워 관세폭탄에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도 붕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약속했던 ‘중국 탈출’ 제조업 리쇼어링(본국 회귀) 전략이 역풍을 맞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강도 관세 정책 추진에는 제조업 일자리를 다시 미국으로 되돌리겠다는 큰 그림이 자리하지만, 정작 중국에서 사업 중인 미국 기업들은 잔류를 택하는 양상으로, 불확실성과 관세 부담 속 중국 사업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차라리 중국에 남는 게 낫다”, 트럼프 관세정책 역풍
지난달 31일(현지시각)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 대통령이 전면적인 관세 인상으로 기업들을 중국에서 철수시키려 했지만 다수 기업은 여전히 중국 투자를 유지하거나 확대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다수의 기업인과 경제단체 관계자들이 중국뿐 아니라 세계 주요 제조 거점 대부분에 일괄적으로 부과된 트럼프의 관세 인상과 향후 통상 조치에 대한 불확실성을 이유로, 중국 잔류가 가장 위험이 적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미국 기업들의 대중국 무역·투자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조직인 미중무역위원회(USCBC)가 지난 7월 발표한 설문조사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가 감지됐다. 해당 조사에서 투자전략을 재검토하는 기업 비중은 다소 늘었지만, 중국에서 운영 중인 미국 기업의 3분의 2가량은 당분간 계획했던 중국 내 투자를 유지할 생각이라고 답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의류신발협회(AAFA)의 스티븐 라마 회장은 무역과 무관한 분쟁 때문에도 손쉽게 관세를 올리는 트럼프의 성향과 중국과의 끝이 보이지 않는 협상은 중국에서 부품을 조달하는 많은 기업들로 하여금 "이게 어디로 가는지 파악될 때까지" 현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든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중국을 떠났다가 엉뚱한 곳으로 생산 시설을 옮겨야 할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USCBC의 연례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국에서 영업 중인 대부분의 미국 기업은 미국과 중국 간의 통상 갈등을 체감했지만, 여전히 상당수 기업은 올해 중국 투자를 확대할 계획이다. 상하이에 본사를 둔 공급망 컨설팅업체 타이달웨이브 솔루션즈의 시니어 파트너 캐머런 존슨은 "중국에서 만들던 많은 것 중 어느 것도 리쇼어링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에는 중국 의존을 재무적으로 대체할 생태계, 인력, 세제 인센티브, 자금이 없다"고 꼬집었다.
美 경제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에 불확실성 증대
기업들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미국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에 직면할 가능성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백악관에서는 "노 패닉(No Panicans)"이라는 구호 아래 경제 상황에 대한 위기감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시장 전문가들과 심지어 트럼프 측근 인사들 사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물가 상승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경고가 이어지고 있으며, 고용 둔화 신호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산 상품에 대한 관세가 30%에서 80%로 대폭 인상될 예정이어서 그에 따른 경제적 파장이 더욱 커질 것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흐름은 지난 2022년에도 동일하게 나타난 바 있다. 당시 조 바이든 전 행정부는 글로벌 공급망에 차질이 생기자 국방물자조달법(DPA)까지 동원해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의 자국 내 생산시설 확충을 장려했으나, 인건비 등 물가가 크게 뛰자 상황이 달라졌다. 여기에 당시 노동 시장이 과열된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에 2차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리쇼어링 움직임을 차단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노동 자체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생겨나면서 미국 기업들이 심각한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는 마당에 생산 공장을 본토로 이동시키면 인건비 상승만 부추길 것이란 우려였다.

중국 대체 기지로 부상했던 인도에 50% 관세 폭탄
기업들의 리쇼어링 결정을 얼어붙게 한 또 다른 이유는 높은 관세율이다. 트럼프 2기에서 부과된 상호주의 관세는 베트남·캄보디아·인도네시아 등 많은 대체 제조 허브에도 적용돼 중국산과 유사한 수준의 높은 관세율을 매기고 있다. 특히 인도는 러시아산 석유 구매를 지속한 인도 기업들을 처벌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를 추가 인상하면서 상품에 추가로 50%라는 초고율 관세를 부과받게 됐다.
기존에 인도는 미국과 관세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을 대체할 최대 제조기지로 간주되며 관세 피해가 덜할 것이라 예측된 바 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 대통령이 강경한 대응을 시사하면서 기업들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고객사와 거래하는 많은 인도 제조업체에는 최근 주문 보류나 생산지를 인도 밖으로 옮기라는 요청이 밀려들고 있다. 갭·콜스 등 미국 브랜드에 의류를 공급하는 펄글로벌의 팔랍 바네르지 전무이사는 "모든 고객이 이미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면서 "그들은 우리가 인도에서 다른 나라로 이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인도 최대 의류 제조업체 레이먼드의 최재무책임자(CFO) 아밋 아가왈은 미국 관세율이 10%인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있는 유일한 해외 공장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 고객들을 위해 석 달 안에 생산 라인을 추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다른 의류업체 리차코 엑스포트도 올해 인도 내 20여 개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미국 브랜드 제이크루 등을 통해 미국에 1억1,100만 달러(약 1,540억원)어치를 수출했지만, 관세 장벽에 부딪히자 네팔 카트만두에 공장을 세우는 방안을 부랴부랴 알아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중국 공장에 의존하는 미국 기업들은 향후 몇 달 내 통상 환경이 더 명확해지길 바라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중국 정부와의 포괄적 무역합의를 마무리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관세를 최대 145%까지 올린 뒤로 미·중 양국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데탕트(긴장 완화)'에 들어갔지만, 이번 여름 동안 진행된 세 차례의 회담에서도 실질적 진전은 거의 없었다.
이와 관련해 상하이 미 상공회의소 전 회장이자 포어사이트 리스트럭처링 파트너인 커 기브스는 중국 공급업체에 의존하는 미국 기업들의 파산이 최근 급증했다고 지적하면서, 특정 제품 의존도를 낮추며 돌파구를 모색한다고 해도 일단 다수의 기업들이 '마비 상태'라고 강조했다. 이어 기브스는 "문제는 관세 그 자체가 아니다"라며 "관세가 오를지 내릴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마비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