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vs 고이즈미’ 차기 日 총리 각축, 다카이치 당선 시 우클릭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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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 아베' 다카이치 前 경제안보상 '펀쿨섹좌' 고이즈미 농림상 경쟁 다카이치 당선되면 한일관계 불확실성 커질 듯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가 취임 11개월 만에 사의를 공식 표명한 가운데, 포스트 이시바에 국내 여론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차기총리 후보자들이 친한파인 이시바 총리보다 강경한 보수 성향을 가진 인물들로 평가받아, 양국간 역사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1년 만에 막 내린 이시바 정권
8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이시바 총리는 전날 사임 의사를 밝혔다. 지난 7월 참의원(상원) 선거 참패 49일만의 자진 사퇴이자, 사실상 ‘이시바 끌어내리기’에 해당하는 조기 총재 선거 윤곽이 드러나기 하루 전 이뤄진 결정이다. 이날 오후 침착한 표정으로 총리 관저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이시바 총리는 “새로운 총재를 뽑는 절차를 개시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임을 결심하게 된 결정타는 사상 초유의 ‘총리 리콜’이다. 퇴진론에도 불구하고 이시바 총리의 버티기가 계속되자 자민당은 지난 2일 양원 총회를 열고 당칙(제6조4항)에 따른 조기 총재 선거 찬반을 8일까지 확인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소속 의원(295명)과 광역지자체 지부 대표자(47명) 등 342명 가운데 절반(172명) 이상이 찬성하면 조기 총재 선거를 치를 수 있는데, 이 규정이 현실화하며 그의 퇴진을 앞당겼다.
이시바 총리의 사임 의사 표명에 따라 자민당은 8일 마감 예정이던 조기 총재 선거 찬반을 묻는 절차 대신 총재 선거 체제로 들어갔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은 다수 의석을 보유한 당 대표가 총리가 되는 구조로, 후임 총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 뒤 국회 지명 선거를 거쳐 결정된다. 일본 언론들은 정치적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르면 이달 안에 선거를 치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최연소’ 고이즈미 vs ‘첫 여성’ 다카이치 유력
차기 총재 유력 후보로는 지난해 9월 총재 선거 결선 투표에서 이시바 총리와 맞붙었던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전 경제안보담당상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전 총리의 아들인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 농림수산상이 거론된다. 부친의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아 인지도가 높은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이시바 정권에서 구원투수로 농림수산상에 기용되며 쌀값 안정화에 기여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퇴진을 거부하는 이시바 총리를 지난 6일 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전 총리와 함께 찾아가 “당을 깨선 안 된다”고 사임하도록 설득한 사람 역시 그였다. 2021년 스가 전 총리의 퇴진 당시에도 조기 사임이란 고언을 전한 것도 고이즈미였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그간 차기 총리의 유력 후보로 꾸준히 거론됐다. 이시바 총리가 승리한 지난해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 당시 그는 이시바 총리, 다카이치 전 안보상에 이어 3위에 올랐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이 총리가 되면 2006년 아베 전 총리(당시 52세)를 뛰어넘은 최연소 총리가 된다. 2019년 38세로 환경상에 올랐을 때도 역대 최연소 남성 장관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다만 현재 차기 총재에 가장 가까운 인물로는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담당상이 꼽힌다. 지난 7월 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에서 그는 차기 총리 후보 적합도에서 26%로 1위를 차지했다. 자민당에서도 보수당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나라현 출신 중의원인 다카이치는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보수 성향 정치인으로, ‘여성 아베’로도 불린다.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여성·비세습 의원으로 아베 신조 내각에서 총무상과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등을 지내며 경력을 쌓았다. ‘강한 일본’을 언급하는 등 아베 전 총리 정치 노선을 전반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매년 두 번씩 야스쿠니 신사 꼭 참배", 강성 우익 다카이치
이에 국내 외교가에서는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담당상이 총재에 당선되면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꾸준히 참배해 왔으며, 지난해 총재 선거에 출마했을 때에도 “총리가 된 이후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계속하겠다”고 공개 선언한 바 있다. 이는 일본 총리들이 국제사회 시선을 의식해 야스쿠니 신사에 직접 참배하지 않고 공물 봉납으로 대신해 왔던 관행을 깨뜨리겠다는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현직 일본 총리는 2013년 아베 전 총리가 마지막이다.
또한 다카이치 전 안보상은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동원을 부정하고, 전쟁을 할 수 없는 일본의 헌법 개정을 지지하는 등 역사 문제 전반에서 우경화된 인식을 노출해 왔다. 지난 2022년 2월 도쿄도에서 열린 ‘야스쿠니 신사 숭경봉찬회’라는 극우단체 주관 심포지엄 강연에서는 한국에 대해 속된 표현을 써가며 비하하기도 했다. 다카이치는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한국, 중국 등 주변국 반발을 겨냥해 “(우리가) 야스쿠니 참배를 중간에 그만두는 등 어정쩡하게 하니까 상대가 기어오르는(つけ上がる) 것”이라고 했다. ‘つけ上がる’(쯔케아가루)는 ‘상대방이 점잖거나 잘해주는 것을 악용해 버릇없이 굴다’, 즉 우리말 속된 표현으로 ‘기어오르다’라는 의미다. 이런 그가 총리직에 오를 경우 한일관계가 과거사 갈등을 중심으로 급속히 경색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다카이치 전 안보상에 비해 비교적 온건한 개혁파로 분류된다. 그 역시 최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전력이 있어 과거사 문제에선 자유롭지 않지만, 이시바 총리 체제에서 중용된 인사라는 점에서 이시바 총리의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고이즈미 농림상 본인의 외교관이 명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지만,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인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일본 보수층에서 '납북자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와도 소통할 여지가 있다는 관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