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제동에도 유증 강행 이수페타시스, 시장은 주가 하락으로 화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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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 제동 7일 만에 정정신고서 제출
김상범 그룹 회장 ‘책임경영 강화’ 강조
유상증자 강행 소식에 주가 9%대 하락
반도체 기판(PCB) 제조업체 이수페타시스가 주주들의 거센 반발에도 유상증자를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신사업 인수의 합리성을 거듭 강조하며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의 참여 계획 또한 제시했다. 시장에서는 이수페타시스가 계열사 살리기에 희생된 이수화학의 전철을 밟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같은 우려에 주가 또한 급락하는 모습이다.
일정만 연기, 내용은 ‘고스란히’
이수페타시스는 11일 금융감독원이 요구한 정정신고서를 제출하면서 증자 신주배정 기준일을 기존 이달 17일에서 내년 1월 20일로 변경한다고 공시했다. 이번 결정에 따라 신주발행가액 확정예정일과 청약예정일, 납입일, 신주상장예정일 등 유상증자 관련 일정이 일제히 순연됐다. 다만 주당 0.30831766주를 배정하고 2,010만주를 새로 발행하겠다는 계획은 그대로다.
앞서 이수페타시스는 5,500억원 규모의 주주 배정 유상증자를 실시하고, 이 가운데 2,998억원을 이차전지 소재 기업인 제이오 주식 및 전환사채 인수에 사용한다고 밝혔다. 유상증자를 통해 새로 발행하는 주식 수는 기존 발행 주식 수의 약 31.8%에 달한다. 시장에서는 주주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고, 이어 금감원까지 제동을 걸며 이수페타시스의 유상증자는 쉽지 않아 보였다.
지난 2일 금감원은 “이수페타시스가 제출한 증권신고서에 대한 심사 결과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아니했거나, 중요사항에 관해 거짓 기재, 혹은 표시되지 않은 부분이 발견됐다”며 “표시 내용이 불분명해 투자자의 합리적인 투자판단을 저해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경우에 해당해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금감원의 요구에도 회사가 3개월 이내 정정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신고서는 철회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불과 7일 만에 이수페타시스가 정정신고서를 내면서 유상증자 절차도 다시 시작됐다. 정정된 증권신고서에는 제이오 인수 결정과 관련한 의사 결정 과정이 담겼다. PCB 제조 단일사업에서 오는 변동 리스크를 보완하기 위해 신사업 진출을 검토했고, 그 제이오가 영위하는 탄소나노튜브(CNT, Carbon Nanotube) 사업이 신규 사업 검토 기준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이수페타시스는 제이오와 고성능 PCB 제조를 위한 CNT를 공동으로 연구하며 PCB 성능 개선에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의 참여도 정정 증권신고서를 통해 확약했다. 당초 이수페타시스는 최대 주주인 이수의 100% 참여 계획을 밝혔지만, 정정을 통해 120% 참여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이 책임경영 강화 차원에서 배정받은 물량의 100%를 청약 참여한다는 설명이다. 현재 김 회장은 이수페타시스 지분 0.9%를 보유하고 있다.
제이오 인수를 위한 차입 계획도 밝혔다. 이수페타시스는 증자 결의 당시 예상 조달금액 5,500억원 가운데 2,500억원은 시설자금으로, 나머지 3,000억원은 제이오 인수에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주주들의 반발이 극심해 당초 계획했던 자금 확보에 차질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수페타시스는 10일 기준 모집총액은 3,719억원으로 예상된다며 제이오 인수에 2,027억원, 시설투자에 1,692억원을 쓰겠다고 밝혔다. 제이오 인수자금 중 모자란 971억원은 회사의 가용자금(1,015억원) 이내에서 차입한다는 계획이다.
소통 없는 신사업 확장에 주가 반토막
시장에서는 PCB 제조업체인 이수페타시스가 이차전지 소재 기업인 제이오 인수를 위해 대규모 유상증자를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라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이수그룹 계열사 가운데 이차전지 소재사가 있음에도 시너지를 확신할 수 없는 제이오를 인수하기 위해 주주들에게 손을 벌린다는 지적이다. 권민규 SK증권 연구원은 “CNT 기업 인수 결정은 무리한 사업확장”이라며 “주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 자본조달로 멀티플(가치평가 적용배수) 하락이 불가피하다”고 평가했다.
양승수 메리츠 증권 연구원 또한 “제이오의 주요 고객사는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 영향으로 장기 공급 계약이 취소되는 등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짚으며 “투자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제이오 인수 의사 결정에 대한 구체적인 배경 및 검토 내용, 중장기 제이오의 성장성에 대한 구체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기업의 주요 의사 결정에는 주주들과의 공감대 형성이 가장 먼저 진행돼야 한다는 의미다.
이와 같은 조언에도 회사가 유상증자를 강행할 의지를 보이면서 이수페타시스 주가는 급락을 나타냈다. 이날 오전 10시 35분 기준 이수페타시스 주가는 전일 종가 대비 2,300원(9.43%) 내린 2만2,100원을 기록했다. 이는 불과 한 달여 전인 10월 24일 기록한 4만6,500원과 비교해 52.5% 하락한 수준이다.
제2의 이수화학 되나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이수페타시스가 이수화학의 전철을 밟을 것이란 우려가 고개를 드는 모습이다. 이수화학은 계열사에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아낌없는 지원으로 그룹 내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부실기업인 이수건설 살리기에 가장 열심이었던 계열사도 이수화학이었다. 앞서 지주회사 이수는 2009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이수건설의 경영권을 이수화학에 넘겼다. 이후 이수화학은 이수건설 뒷바라지에 3,000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쏟아부었다. 이수화학 시가총액(1,411억원)을 2배 이상 웃도는 자금이 이수건설로 흘러 들어간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수건설의 경영정상화는 요원한 상태로, 오히려 부실이 심화하기까지 했다. 이수건설은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16년간 누적 영업손실 5,083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233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계열사를 살리려는 노력과 함께 이수화학이 막대한 재정 부담을 떠안았음은 물론이다. 3분기 말 기준 이수화학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596억원에 불과한 반면, 단기차입금은 1,358억원에 달한다. 유동비율 또한 100% 이하로 떨어지며 단기부채 상환 능력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룹 안팎에서 ‘이수화학은 이제 쓸모를 다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수그룹 입장에서는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해 줄 이수화학의 다음 주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수페타시스는 시장의 비판과 주주들의 거센 반발에도 그룹 회장의 참여까지 약속하며 신사업 확장을 강행하고 있다. 이수화학의 다음 주자로 이수페타시스가 낙점됐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