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지난 2021년 문재인 정부 및 더불어민주당에서 추진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처법)은 산업 현장에서 중대한 재해가 일어나 종사자들에 피해가 발생할 경우, 해당 사업주나 경영책임자, 공무원, 법인 등을 형법과 민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골자다. 다만 제정 과정상에서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을뿐더러 헌법에 위배되는 조항도 포함돼 있어 논란이 끊이지 않는 모양새다.
이에 국회미래연구원은 25일 의회의 역할을 중심으로 중처법 제정의 정치 과정을 분석한 ‘국가미래전략 Insight’ 보고서를 발간하고, 법적 실효성 증대와 법에 기반한 시민 안전 보장을 위해 국내 법제화 과정이 개선될 필요성 등을 강조했다.
중처법의 의제화 과정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삼성 백혈병 운동, 가습기 살균제 참사 등이 연이어 터지며 국민들의 생명 안전에 대한 관심과 정치적 논의가 촉발됐다. 이후 4.16연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등 21개 사회단체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연대’를 출범시키고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청원법안을 2015년 8월에 제출했다.
하지만 국회에서는 관련 법안이 제대로 논의되지 않고 법안 상정과 폐기만 거듭했다. 그러던 중 2020년 4월 이천 물류센터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38명이 사망하자 중처법 제정에 관한 여론이 재형성됐다. 이후 9개월 만에 법안 제정이 완료되며 중처법이 시행됐다.
법률 전문가들 사이에선 6년 가까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법 개정이 순식간에 진행된 탓에 법 개정에 성급했다는 의견이 나온 바 있다. 또 당시 중처법 개정을 맡았던 A씨는 “보름 가까이 밤낮없이 일해 급박하게 법을 개정했다”며 “중간 교류를 풍부히 갖고 숙성시간을 가지며 법안을 개정하거나 강화했으면 중대재해처벌법이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의견을 전했다.
졸속으로 처리된 중처법
대다수 기업 관계자들은 중처법을 통해 기업의 안전보건 조치를 강화하고, 안전 투자를 확대해 종사자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한다는 법안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경영진에 지나친 책임을 요구한다며 불만을 표하고 있다.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한 대표자는 직장인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를 통해 “종사자들이 스스로 안전을 보호하지 않아 벌어진 일도 경영진이 뒤집어써야 한다는 거냐”며 “막말로 배달의 민족은 배달원이 운행 중 사고 날 때마다 경영진이 감옥에 가야 할 수도 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임우택 한국경영자총협회 안전보건본부장 역시 “중대재해처벌법은 여론의 압박과 정치적 상황만 고려해 졸속 제정됐다는 점이 문제”라며 “경영자에 대한 처벌보다 산업안전 행정 시스템의 전문성 확보 등 예방 행정의 역량 강화가 시급함에도 국민과 근로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다는 당위론이 이긴 셈”이라고 분석했다. 국회미래연구원 역시 중처법 제정 과정이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등 주요 당의 일관된 정책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며 정당 내 조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진행된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한국 입법 과정 변화 필요해
국회미래연구원은 국내 주요 당들이 이익을 대표하고 정책을 형성하는 데 대체로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또 중처법 의제화 과정에서 ‘중대재해를 어떻게 방지하고 보다 안전한 일터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빈약했을뿐더러 당론도 느슨했다고 역설했다. 정당이 조직된 의견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에 정당간 이견 뿐만 아니라 자당 의원 간 견해차가 발생해 법안이 무분별하게 발의됐단 얘기다.
이에 대해 한 전문가는 “중처법 제정 과정을 포함해 국회 입법 과정에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라며 “국회에서 법이 통과되면 이후 정책 수용자 집단에 전달할 수 있는 체계와 절차를 만들거나 현장에 필요한 보완책과 개선책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관련 논의가 전무하다”고 꼬집었다.
국민적 요구가 있는 정책에 대해 지금처럼 개별 의원실이 대응 법률을 만들고 졸속으로 합의해 법안을 시행할 경우 책임 있는 집행으로 이어지기 어렵게 된다. 국민들을 보호하고 안전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 법률 제정의 목적인 만큼 주요 당 내부와 정당 간 합의 및 숙고 기간을 충분히 보장해야 할 것이며, 이를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