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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위기 몰린 신탁사들, 대주단 “신탁사가 준공 마무리하라” ‘고수익 사업’ 책임준공 토지신탁,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오나 신탁사 리스크에 ‘공백’ 우려, “대주단부터 건설사까지 위기 피하기 어려울 것“
건설사의 준공 책임을 투자자에 약속한 부동산신탁사에 처음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제기됐다. 건설경기 침체로 중소건설사의 부도 위험이 커지면서 부동산 호황기에 무분별하게 ‘책임준공’ 약정을 맺은 신탁사를 상대로 줄소송이 이어질 수 있단 우려가 쏟아지는 가운데, 전문가들 사이에선 신탁사 리스크가 건설업계 전반의 경색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신한금융그룹 손해배상 소송, 책임준공 리스크 시작되나
21일 법조계와 금융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연기금, 증권사 등으로 이뤄진 인천 원창동 물류센터 건설공사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주단은 지난달 책임준공 의무를 어겼다며 신한금융그룹 산하 신한자산신탁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아울러 시공사 에스원건설, 시행사 케이엘케이에이치원을 상대로도 원리금 상환 청구 소송을 냈다. 대주단이 제기한 손해배상액은 총 575억원이다. 당초 에스원건설은 작년 말 물류센터를 완공할 계획이었으나 건설자재비와 인건비 급등으로 기한 내 공사를 끝내지 못했다. 이에 대해 대주단은 “책임준공을 확약한 신탁사가 대신 원리금을 갚고 준공과 분양을 마무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중소건설사를 대신해 신탁사가 보증을 선 ‘책임준공 관리형 토지신탁’ 수탁액은 지난 3년 동안 두 배로 불어나 17조원을 넘어섰다. 신탁사가 책임준공을 보증한 사업장은 전국적으로 1,000여 곳이 넘는다. 당초 해당 사업은 신탁사가 사업비의 2%를 떼가는 고수익 사업이었던 만큼 금융회사들이 너나없이 뛰어든 ‘이슈 상품’이었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 침체 장기화로 시장은 지뢰밭으로 변했다. 실제 신한자산신탁을 시작으로 중소 건설사를 대신해 책임준공 의무를 떠안은 부동산신탁사들이 잇따라 손해배상 소송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호황기에 ‘효자상품’으로 주목받던 책임준공 관리형 토지신탁이 건설사 부실 아래 부메랑처럼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최근 들어 건설경기 침체와 공사비 상승 여파로 책임준공형 신탁으로 추진된 다수의 PF 사업이 부실 위험에 처하면서 위기 전이 속도가 한층 빨라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업계에 따르면 시공 능력 중위권 건설사들의 기업회생절차 신청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이미 이달 들어서만 시공 능력 105위 새천년종합건설, 122위 선원건설 등이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갔다. 관계자에 따르면 새천년종합건설이 시공 중이던 경기 평택 물류센터 공사가 중단돼 대주단이 KB부동산신탁에 책임준공 의무 위반으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준비 중이기도 하다. 올 하반기 신탁사 대상 소송이 더욱 증가할 것이란 전망이 업계 안팎을 불문하고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무너지는 신탁사, “업계 전반으로 리스크 확산할 수도”
다만 이에 대해선 대주단 책임론도 나온다. 같은 사업장에서 대주단이 시공사의 책임준공기한은 연장하면서 신탁사의 책임준공 관리형 개발신탁 기한은 연장하지 않은 사례가 거듭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신탁사의 책임준공 기한이 시공사의 책임준공 기한보다 먼저 도래하는 기이한 구조가 업계 전반에 확산됐고, 이것이 신탁사 리스크가 발생한 데 큰 축이 됐다는 지적이다. 사실상 대주단이 자금 회수 최적화를 이루기 위해 신탁사를 제물로 바쳤단 볼멘소리도 일각에선 나온다.
문제는 신탁사가 무너지면 그와 결부된 건설사, 대주단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폭탄을 떠안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금의 신탁사 책임준공 리스크 저변엔 시공사의 자금난이 깔려 있다. 공사비 급등, 금리 상승 등으로 건설사들의 유동성이 약화하면서 일종의 ‘보험’ 상품을 내건 신탁사가 떠안는 책임이 늘어났단 의미다. 신탁사 차원에서 사업비를 추가로 투입해도 법원 판례에 따라 분양 대금은 대주단의 대출 금액 상환으로 활용되는 게 우선이다.
실제 앞서 코람코자산신탁은 ‘부산 범천동 오피스텔’,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 오피스텔’ 사업 등에서 시공사 자금난으로 사업비를 추가 투입했으나 해당 판례가 나온 판결 아래 550억원대 손실이 불가피해진 바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신탁사가 소리도 없이 무너진다면, 당장 신탁사의 공백을 메꿔야 할 이들은 상당한 리스크를 짊어져야만 한다.
신탁사는 국내 부동산 PF 아래 매우 중요한 기관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PF대출약정은 관리형 토지신탁계약을 안전 장치로 해 구성된다. 각 약정서상 효력도 신탁계약을 가장 우선으로 한다. 이는 관리형 토지신탁계약이 PF대출금 회수에 있어 신뢰성이 상당히 높음을 방증한다. 특히 책임준공 관리형 토지신탁은 신용등급이 낮아 대주단 돈을 빌려오기 어려운 중소형 건설사들이 많이 활용하는 방식이다. 신탁사 빈자리가 클 수밖에 없는 만큼, 현시점의 책임준공 리스크가 차후 대주단, 시공사, 수분양자, 여타 사업장 등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갈 수 있단 우려가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쏟아지고 있다.
신탁계정대 57.9% 급증, 신탁사 부담 ‘가중’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시공사는 물론 신탁사까지 준공 기한을 채 맞추지 못한 사업장은 4곳에 달한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료를 살펴보면 지난해 시공사가 준공 기한을 못 지켜 채무인수를 받은 사업자옫 26개에 육박한다. 해당 사업장에 보증을 선 신탁사들 중 하나자산신탁이 17개로 가장 많았고, 이외 대한토지신탁 3개, KB부동산신탁 및 신한자산신탁이 각 2개, 교보자산신탁과 대신자산신탁이 각 1개씩이었다. 시공사와 신탁사가 모두 공사 기한을 지키지 못한 경우는 대신자산신탁 2개 사업장, 교보자산신탁과 한국자산신탁이 사업장 각 1개씩이다.
이처럼 사업장 곳곳에 구멍이 나타나면서 신탁사들의 자금 부담은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 신탁사가 시행사나 조합에 빌려주는 신탁계정대는 지난해 9월 말 기준 4조800억원으로 2022년 12월 말(2조5,833억원)보다 57.9%나 급증했다. 특히 책임준공형 사업장이 가장 많은 KB부동산신탁의 경우 2022년 12월 말 2,423억원이었던 신탁계정대가 9개월 만에 5,050억원으로 108.4% 늘어났다. 도미노의 시작점에 윤곽이 잡히고 있는 모양새다. 이에 일각에선 2009년 발(發) 글로벌 금융위기발 증권사 리스크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역사의 굴레가 돌아가듯, 지난날의 위기가 이번엔 신탁사를 매개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