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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비와 같은 GLP-1 유사체 계열 비만 치료제 '삭센다'
알츠하이머 환자 시험 결과, 뇌 수축률·인지기능 저하 속도↓
비만·당뇨 넘어 뇌·신장 질환에도 효과, 적응증 확대 경쟁 가속
비만 치료제가 알츠하이머 치매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규모 임상시험에서 기억과 인지 능력을 조절하는 뇌 부위가 수축되는 속도를 늦춰 치매 진행 속도를 막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비만 치료제 '삭센다', 치매 진행 늦춘다
1일 알츠하이머협회 및 외신 등에 따르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Imperial College London) 연구진은 미국에서 열린 알츠하이머협회 국제 학술대회(Alzheimer's Association International Conference, AAIC)에서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Novo Nordisk)의 삭센다를 알츠하이머병 환자에게 투여하자 인지 기능 저하 속도가 18% 느려졌다고 밝혔다. 마리아 카리요(Maria C. Carrillo) 알츠하이머협회 최고과학책임자(CSO)는 “알츠하이머병의 진행 양상을 바꿀 수 있는 더 많은 옵션이 있다는 희망을 보여줬다”며 “우리는 알츠하이머병 진행을 늦추고 예방할 수 있는 ‘약속의 시대’에 있다”고 평가했다.
알츠하이머병은 전 세계 치매 환자 5,500만 명 중 3분의 2를 차지하는 퇴행성 뇌 질환이다. 신경세포 안밖에 이상 단백질들이 축적되면서 기억력과 학습력 같은 인지 기능이 손상된다. 연구진은 경증 알츠하이머병 환자 204명을 모집해 소규모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참가자 절반에게는 삭센다의 주요 성분인 리라글루타이드(Lilaglutide)를 투여했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가짜약(위약)을 투여한 후 1년 뒤 뇌 기능의 변화를 평가했다. 리라글루타이드는 이미 빅토자(Victoza)라는 이름의 당뇨병 치료제로 지난 2010년 미 식품의약국(FDA) 첫 승인을 받았다. 이후 노보 노디스크가 리라글루타이드를 개선한 물질 GLP-1 유사체인 세마글루타이드를 발굴해, 오젬픽(당뇨병)과 위고비(비만치료제)를 개발했다.
연구진은 당초 리라글루타이드가 뇌의 포도당 대사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포도당은 뇌가 사용하는 에너지원으로, 뇌가 포도당을 많이 썼다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리라글루타이드를 투여한 환자와 위약을 투여한 환자 사이에서 뇌의 포도당 대사율은 차이가 없었다. 대신 뇌 조직의 수축을 막는 효과가 확인됐다.
아울러 뇌 수축을 차단해 인지 기능 저하도 막았다. 리라글루타이드를 투여한 환자는 기억력, 이해력, 언어력, 공간지각 능력을 확인하는 인지 기능 검사에서 위약을 투여한 환자보다 인지 기능 감소율이 18%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폴 에디슨(Paul Edison) 임페리얼칼리지런던 교수는 “뇌 수축이 느려진다는 것은 리라글루타이드가 뇌를 보호한다는 의미”라며 “리라글루타이드는 뇌의 염증을 줄이고, 아밀로이드 베타와 같은 단백질의 독성을 줄이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스웨덴 연구진도 "삭센다, 치매 발병 위험 축소" 입증
앞서 지난 6월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Karolinska Institute)도 이와 비슷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리라글루타이드가 65세 이상 제2형 당뇨병 환자의 치매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스웨덴 보건위원회 통계를 토대로 지난 2010년 1월 1일부터 2020년 6월 30일까지 GLP-1 유사체와 DPP-1억제제, 설포닐우레아를 처방받아 복용한 65세 이상 제2형 당뇨병 환자 8만8,381명을 추적 관찰했다. GLP-1 유사체 처방 환자는 1만2,351명, DPP-4억제제는 4만3,850명, 설포닐우레아는 3만2,216명이었다.
평균 4.3년을 추적한 결과, 8만8,381명 가운데 5.2%인 4,607명에서 치매가 나타났다. 그런데 GLP-1 유사체 복용 환자의 치매 발병률이 현저히 낮았다. 이 기간 동안 GLP-1 유사체 복용 환자는 278명(1,000명당 6.7명)이 치매 진단을 받았다. 이는 DPP-4억제제 1,849명(1,000명당 11.8명) 설포닐우레아 2,480명(1,000명당 13.7명)보다 낮은 수치로, 즉 빅토자를 복용한 사람이 설포닐우레아와 DPP-4 억제제를 복용한 사람보다 치매 위험이 현저히 낮았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연령 △등록 연도 △성별 △사회·경제적 요인 △건강 상태와 과거 사용 약물 등을 조정해도 이 같은 효과는 일관되게 나타났다고 밝혔다.
비만치료제, '만병통치약' 되나, 심혈관·뇌 질환·수면장애에도 효능
이에 제약사들은 GLP-1 계열 비만 치료제의 파이프라인 적응증을 잇따라 확대하고 있다. 기업 매출 상승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넘어 중장기적으로 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라이 릴리와 노보 노디스크는 당뇨약으로 시작해 비만치료제로 단숨에 글로벌 제약사 시가총액 1,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최근에는 비만 외에 다양한 만성질환까지 치료 영역을 빠르게 확대하며 입지를 굳히는 모습이다.
올해 1분기 노보 노디스크 오젬픽 매출은 43억 달러(약 5조9,000억원), 위고비 매출은 13억 달러(약 1조8,000억원)를 기록했으며, 2월 기준 노보 노디스크가 차지하고 있는 세계 시장 점유율에서 비만치료제의 글로벌 점유율은 85.4%까지 치솟았다. 지난 1분기 마운자로와 젭바운드를 포함한 일라이 릴리 매출도 23억 달러(약 3조1,700억원)에 달했다. 현재 일라이 릴리와 노보 노디스크의 시가총액은 각각 10위와 13위다.
이런 가운데 GLP-1 계열 약물을 중심으로 한 비만약 시장은 이제 심혈관질환·치매·수면장애·비알코올성 지방간(MASH) 등으로 치료 범위를 넓히고 있다. 앞서 노보 노디스크는 지난 3월 미국 FDA에 비만 과체중 환자의 주요 심혈관 질환 위험 감소를 위해 GLP-1 계열 비만 치료제인 위고비를 쓸 수 있도록 승인받았으며, 젭바운드 또한 관련 임상 3상을 진행 중이다.
심혈관 질환 다음으로 유력한 적응증 분야는 신장 질환이다. 지난 5월 열린 유럽 신장학회(ERA)에서 발표한 SELECT 시험 결과에 따르면 과체중이거나 비만이지만 당뇨병이 없는 심혈관 질환 환자의 경우 2.4mg의 세마글루타이드가 신장 기능 저하를 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MASH를 개선하는 효능도 임상을 통해 입증되는 등 다양한 적응증으로 활용 영역을 확대하면서 '만병통치약'으로 거듭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