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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중국식 ‘996’ 초과 근무제 수용 딥시크, 고성능·저비용 모델로 AI 전장 재편 노동 강도와 혁신의 교차점, 성과·윤리·협력의 경계 시험

유연한 근무시간을 복지 혜택으로 내세웠던 실리콘밸리가 중국식 ‘996(오전 9시 출근, 오후 9시 퇴근, 주 6일 근무)’ 체제를 도입하고 있다. 딥시크(DeepSeek)와 같은 중국 스타트업들이 추론 능력 벤치마크에서 뛰어난 성능을 보이면서도 훈련 비용은 극히 낮은 오픈소스 언어 모델을 앞세워 미국의 기술 우위를 정면으로 위협하고 있어서다.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초과 노동과 이념적 검열이 공존하는 이 새로운 노동 문화는 글로벌 협력의 윤리적 한계를 시험하는 모습이다.
미·중 테크 교차로서 부상하는 새로운 문화
27일(현지시간) IT전문 매체 와이어드에 따르면 한때 ‘현대판 노예제’라는 비판까지 받았던 중국식 996 근무제가 최근 미국에서 부활하고 있다. 다수의 실리콘밸리 AI 스타트업들은 주 72시간 근무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 대가로 인센티브나 주식 옵션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AI 스타트업 릴라(Rilla)가 대표적이다. 최근 릴라는 전 직원에게 996 근무제를 적용했다. 이와 관련해 릴라 창업자는 “AI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 정도 집착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펠라앤딜라일라(Fella & Delilah) 또한 자발적 996 근무제 참여자에게 급여와 지분을 대폭 상향하는 보상 체계를 도입했다. 실리콘밸리에서 ‘야망의 대가는 초과 근무’라는 역설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때 혁신과 복지의 상징이었던 실리콘밸리 기업 문화가 노동 집약적 모델로 급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유연한 근무제, 창의적 휴식 공간, 자율적 문화는 점차 구시대 유물로 밀려나고 있으며, 집요한 성과 중심의 노동 윤리가 이를 대체하고 있다.

‘10분의 1 비용’으로 AI 모델 전장 흔든 딥시크
실리콘밸리의 긴장감을 자극한 건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다. 딥시크는 오픈소스 언어모델 ‘R1’을 출시해 글로벌 주목을 받았다. 수학과 추론 능력에서 서구 선도 모델을 상회하는 수준이며, 훈련 비용은 약 600만 달러(약 83억원)로 오픈AI GPT-4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딥시크의 앱은 미국 앱스토어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하며, 투자 시장과 IT업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AI 패권이 더 이상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됐고, 일각에선 이를 ‘AI 분야의 스푸트니크 모먼트(Sputnik Moment·개혁의 중대한 전환점)’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딥시크 모델은 단순한 기술 성과를 넘어 검열 이슈를 동반하고 있다. 와이어드에 따르면 해당 모델은 대만, 톈안먼 등 중국 당국이 민감하게 여기는 정치적 주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응답을 회피한다. 오픈소스 버전조차 중국 정부의 규제 기조에 부합하는 형태로 설계돼 있으며, 검열은 시스템 레벨이 아닌 응용 단계에서도 일관되게 적용된다. 이런 딥시크는 중국 정부, 자동차, 금융업계 등 다양한 산업군에 기술 공급을 확대하며 중국 ‘AI 국산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실제 활용도가 낮더라도, 상징적 채택만으로도 기술 자립과 국가 경쟁력을 과시하는 데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AI 기술, 인간 중심 원칙과의 병행이 과제
이 같은 흐름은 글로벌 AI 산업이 기술력뿐만 아니라 가치 기준의 갈림길에 서 있음을 방증한다. 속도와 효율이 지속가능성과 윤리를 압도하고, AI라는 기술이 인간 중심의 가치와 충돌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중국 내에서도 996 체제는 최근까지도 비인기였지만, 딥시크의 급부상은 ‘성과’가 어떻게 사회적 기준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실적이 문화를 정당화하고, 윤리적 기준마저 재정의한 셈이다.
다만 미국 내 노동 전문가들은 실리콘밸리의 초과 근무 문화가 미국의 노동법에 정면으로 배치될 수 있다고 꼬집는다. 일과 삶의 균형, 포용성 등 과거 실리콘밸리의 핵심 가치가 해체되고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기업의 지속가능성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돌봄 부담이 있는 근로자나 건강상 장시간 노동이 어려운 사람들은 사실상 배제될 수밖에 없다. 실리콘밸리의 핵심 가치였던 자율성과 균형이 ‘무한 경쟁’ 논리 앞에 후순위로 밀리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지속 불가능한 문화를 모방할 것이 아니라, 근무시간에 대한 한계 설정, AI 모델의 투명성 확보, 윤리적 데이터 사용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빠르고 저렴한 모델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현시점 국경을 넘나드는 AI 기술 경쟁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은 기술적 역량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원칙을 얼마나 지켜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기술의 미래는 존엄과 다양성, 민주적 가치를 토대로 한 혁신을 통해 정의될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