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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재정 여력 한계에 협상 난항
재계와 공동 대응 시도 움직임
기업 압박↑ ‘강요된 이전’ 우려

미국이 한국에 4,000억 달러(약 554조원) 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를 요구하면서 양국 고위급 협상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현실적 재정 여건상 즉답을 피하며 재계와의 조율에 나섰고, 공식 대응보다는 민간 중심 해법 모색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많은 대기업이 대미 투자 확대 압박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제조업 생산 기지가 해외로 이전하는 공급망 재편에도 속도가 붙는 형국이다.
일본·EU 이어 이번엔 한국 타깃
27일(이하 현지시각) 외신에 따르면 관세 부과와 관련한 한미 고위급 회담이 최근 줄줄이 취소되면서 협상이 난항에 빠졌다. 25일로 예정됐던 ‘2+2’ 경제장관 회의는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의 긴급한 일정을 이유로 취소됐고, 이에 앞선 21일에는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백악관을 찾았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당시 위 실장은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 회동할 예정이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루비오 장관을 긴급 소환하면서 만남이 무산됐다.
외교계에선 잇따른 회담 취소가 미국 정부의 압박 전술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카네기멜런 전략기술연구소의 트로이 스탠거론 연구위원은 “(미국 측의) 일방적인 회담 취소는 남은 협상 시간을 줄여 한국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짙게 드러난다”면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는 나라가 하나둘 늘어날수록 한국이 협상테이블에서 낼 수 있는 목소리 또한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미국의 압박은 매우 거센 상황이다. 현재 확인된 미국의 요구는 4,000억 달러 규모의 투자와 에너지 수입 확대, 자국 디지털 서비스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 등이다. 이는 한국이 제시한 1,000억 달러(약 138조원) 규모의 기업 투자와 쇠고기·쌀 수입 규제 완화 등과 비교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에 앞으로의 투자 규모와 조건, 반도체·방산 같은 산업별 협력 방안이 이번 협상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는 양상이다.
미국이 제시한 투자액은 한국보다 먼저 미국과의 협상에 성공한 일본, 유럽 등이 약속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매우 막대한 규모임은 분명하다. 앞서 유럽연합(EU)은 기존에 부과된 30%의 관세율을 15%로 낮추기 위해 7,500억 달러(약 1,038조원)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와 군사 장비를 구매하고, 기존 투자 외에 6,000억 달러(약 830조원)를 추가로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바 있다.
일본 역시 5,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투자와 보잉사 항공기 100대 구입,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가스관 건설 프로젝트를 위한 미·일 조인트벤처(JV) 설립 등을 약속하며 관세를 기존 25%에서 15%로 낮췄다. 특히 일본의 대미투자 규모는 초기 4,000억 달러에서 협상 막바지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일방적으로 5,500억 달러로 상향한 전례가 있는 만큼, 한국도 유사한 압박을 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외교계의 중론이다.
기업 중심 ‘민간 투자안’ 유도 전략
우리 정부는 미국 측의 요구에 즉각적인 답변보다는 시간을 벌며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현재 정부는 공급망기금, 첨단산업전략기금 등 국내 전략기금과 비슷한 기금을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이 대출·투자를 맡고, 무역보험공사가 보증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현행법상 수출입은행 등 국내 정책금융기관이 해외 기업이나 외국 정부의 사업에 직접 대출 또는 보증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펀드의 투자 대상은 ‘한·미 제조업 협력 프로젝트’로 제한될 전망이다.
동시에 재계와의 접촉 또한 이어가고 있다. 국내 정책금융기관의 해외 투자 경험과 자산 규모상 펀드 규모가 미국 측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달 중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만난 데 지난주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김동관 한화 부회장을 만났다. 또 24일 오후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만찬 회동을 가졌다.
이들 기업은 이미 미국에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상태지만, 이번 정부의 요청에 따라 추가 투자에 나서야 할 가능성 또한 높아지는 상황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3월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210억 달러(약 29조원) 규모의 대미투자 계획을 발표했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370억 달러(약 51조원)와 28억7,000만 달러(약 4조원) 투자 계획을 밝혔다.

생산기지 해외 이전에도 속도 붙나
이처럼 미국의 투자 요구가 사실상 한국 재계에 대한 압박으로 전환되면서 국내 주요 기업들의 미국행이 더 빨라질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정부의 재정 투입 한계가 명백한 상황에서 대기업들의 대미 투자 확대가 가장 현실적인 대응 수단으로 떠오르면서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형적인 ‘무역 불균형 해소 방식’과도 일치한다. 먼저 대규모 투자를 요구하고, 협상 과정에서 관세 인하를 빌미로 압박을 가하는 식이다. 먼저 협상에 나선 일본, EU에 이어 이번엔 한국이 그 타깃이 된 셈이다.
산업별로 보면, 고부가가치 품목일수록 미국 이전 압력이 더욱 크다.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등은 미국 정부의 보조금 정책과 맞물려 현지 생산이 유리한 구조가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는 대다수 기업 역시 미국 시장을 전략적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는 만큼 자발적 투자처럼 보이는 결정들이 실상은 ‘강요된 선택’에 가깝단 해석이다. 특히 미국 내 소비시장을 직접 겨냥하는 제품일수록 현지 생산을 통해 무역 장벽과 정치적 리스크를 피하려는 경향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반면 노동집약적 저가 품목들은 동남아로의 이전이 더 합리적인 대안으로 주목받는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은 인건비가 낮고 생산 인프라도 탄탄해 섬유와 가전, 완구 같은 품목을 중심으로 이미 생산기지가 빠르게 이동 중이다. 이는 곧 미국에 수출할 고가 전략 제품은 미국에서, 글로벌 유통을 노리는 대량 생산품은 동남아에서 만드는 이원화 구조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단기적으로 미국과의 갈등을 완화할 수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국내 산업 생태계의 약화를 초래할 것이란 우려로 이어진다. 국내 일자리 감소, 기술 유출 우려, 세제 혜택 역차별 문제 등 후속 과제가 산적한 탓이다. 나아가 트럼프식 자국 중심주의가 본격화되면, 미국 내에서도 외국계 기업에 대한 새로운 장벽이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단 지적이다. 미국의 요구가 단순한 투자 유도를 넘어 ‘정치적 거래’의 성격까지 띤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와 기업 모두 장기 생존 전략을 재정비할 필요성도 커지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