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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약품 이사회, 임종윤 대표이사 선임 안건 부결
신 회장·모녀 '혈맹'으로 지형 기울어, "예견된 결과"
박재현 대표 중심 '전문경영인 체제' 탄력받을 전망
한미약품그룹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지주사(한미사이언스)와 종속회사(한미약품그룹) 간 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3월 한미사이언스 주주총회에서 임종윤·종훈 형제의 손을 들어줬던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 송영숙·임주현 모녀와 ‘3자 연합’을 구성하며 무게추가 옮겨간 여파다. 여기에 임종윤 한미약품 사내이사가 제안한 안건이 모두 부결되면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됐다.
임종윤 대표안 부결, 박재현 대표 체제 유지
3일 바이오업계에 따르면 한미약품 이사회는 전날 임종윤 이사의 단독대표 선임 안건을 부결했다. 임 이사 요청으로 소집된 이날 이사회에서 임 이사는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이사의 해임과 자신의 단독 대표 선임을 추진했다. 아울러 박 대표의 북경한미 동사장 선임에도 반대했다. 하지만 임 이사는 표심을 뒤집는 데는 실패했다.
이번 이사회 결과는 사실상 예견된 일이었다. 이사회 과반이 임 이사의 대척점에 서 있는 송영숙 한미약품 회장 측이기 때문이다. 올해 초만 해도 형제 측이 그룹 경영권 분쟁에서 승리한 이후 자신들을 포함해 4명을 새로 이사로 선임해 6대 4로 경쟁했다. 한두 사람만 입장을 바꾸면 형제 측도 겨룰 만한 구도였다. 그러나 당시 형제와 손을 맞잡았던 신동국 회장이 모녀 측과 3자 연합을 구성하면서 7대 3으로 이사회 지형이 크게 기운 상황이다.
현재 지분율 경쟁에서도 3자 연합이 월등히 앞서고 있다. 지난 7월 초 맺었던 한미사이언스 지분 6.5%(444만4,187주) 매매 계약이 3일 완료되면서 신 회장의 지분은 18.93%까지 올라간 상태로 송 회장 6.16%, 임주현 부회장 9.70% 등 3자 연합의 특별관계자 지분 총합은 48.19%에 달한다. 당시 신 회장과 모녀 측은 주식매매계약과 동시에 의결권 공동행사 약정도 체결하는 등 혈맹을 맺었다. 반면 형제 측은 임종윤 이사 10.14%, 임종훈 대표 10.80%를 포함해 특별관계자 지분이 29.07%에 불과하다.
신 회장은 앞서 1차 경영권 분쟁이 일었던 지난 3월 주총에서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한미약품 창업자인 고(故) 임성기 회장의 고향 후배로 14년 넘게 한미사이언스 지분 12%대를 유지한 개인 최대주주기도 하다. 신 회장이 돌연 변심해 모녀 측으로 돌아선 표면적 이유는 "한미약품그룹 발전을 위한 대승적 결단" 때문으로 알려졌다. 신 회장이 모녀 측 지분 매입 직후 '전문경영인 체제' 등을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이런 가운데 업계는 이번 임 이사의 대표 선임 불발이 박 대표 체제에 힘을 싣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한미약품은 지주사에 위임했던 인사·법무 업무를 신설 조직에 이관하는 독자 경영 수순을 밟고 있다. 앞서 박 대표는 지난 28일 한미약품에 인사팀과 법무팀을 신설한 데 이어 29일 한미사이언스의 종속회사로서가 아닌 한미약품만의 독자적 경영을 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박 대표는 모녀 측을 공개적으로 지지해 온 대표적인 인물로 올 초 임주현 부회장이 승진할 때 함께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 발탁됐다.
형제 측 경영권 위기 봉착
이에 반해 형제 측은 경영권 장악에 실패할 위기에 빠졌다. 형제는 지난 3월 한미사이언스 정기 주총에서 모녀를 제치고 한미약품 경영권을 확보했다. 형제가 모녀에 비해 열세라는 평가를 완전히 뒤집은 결과였다. 형제는 지난 1월 기준 보유 지분이 28.42%로 모녀의 35%에 뒤처졌고, 여기에 7.66%의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기금까지 모녀를 지지하면서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당시 정기 주총을 앞두고 신 회장과 일부 친인척, 소액주주연대가 형제 측을 지지하면서 극적으로 승기를 거머쥐었다. 이후 형제 측은 가족 간 화합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내비쳤지만, 모녀와 형제는 정기 주총이 열리기 전까지 경영권 차지를 위한 정당성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치열하게 상호 비방전을 벌인 탓에 갈등 봉합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지난 7월 모녀와 형제는 신 회장의 중재로 손을 맞잡으며 돌연 분쟁 종식을 알렸다. 극한 갈등을 빚던 총수일가 4명이 처음으로 합치된 의사를 낸 배경은 ‘돈 문제’였다. 당장 상속세와 주식담보대출을 합쳐 수천억원이 넘는 자금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만큼, 갈등을 봉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화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 회장이 모녀 측과 연대하면서 경영권 갈등이 재촉발된 것이다.
업계는 신 회장의 변심에 형제 측에 대한 불만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한다. 형제 측이 경영권을 확보한 이후에도 1조원 투자 유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데다 한미사이언스 주가가 좀처럼 힘을 받지 못하자 신 회장이 이에 불만을 품고 연대 파트너를 모녀로 바꿨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 회장이 모녀와 지분 매수 계약을 체결한 지난 7월 3일 기준 한미사이언스 종가는 3만1,150원으로 정기주총일(3월 28일) 대비 29.8% 하락했다. 이는 모녀와 형제 간 경영권 분쟁의 불씨로 작용한 한미약품그룹과 OCI그룹 통합계획이 발표된 지난 1월 12일 종가(3만8,400원)와 비교해도 18.9% 하락한 수치다. 사업사인 한미약품의 주가도 같은 기간 각각 18%, 20.5% 고꾸라졌다.
해외 투자 유치도 안갯속
모녀와 형제는 경영권 분쟁뿐 아니라 상속세 해결 희비도 엇갈린 상황이다. 모녀는 신 회장과의 지분 매매 거래로 상속세 문제를 해결했으나 형제는 아직 상속세 재원 마련 해법을 아직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속세 납부와 주식담보대출 상환 등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으로 내세운 투자 유치가 좀처럼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어서다. 사모펀드(PEF)업계는 봉합되지 않는 가족 간 갈등에 투자자들이 혀를 내두르고 있다고 평한다. 오너 일가의 여전한 내부 갈등 기류와 지분 매각을 두고 좁혀지지 않는 입장 차가 거래 난이도를 높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PEF업계에서 '한미 측이랑 얘기 안 한 곳이 없을 것'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이미 많은 투자자들이 한미약품에 대한 투자를 검토했다.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베인캐피탈, 칼라일 등 글로벌 PEF뿐 아니라 최근 국내 주요 거래에 자주 등장하는 메리츠증권도 투자 검토에 나섰다. 하지만 아직도 마땅한 투자 조건 협의는 보지 못하고 있다.
특히 KKR은 송 회장이 OCI그룹과의 통합을 발표한 올해 1월부터 형제 측과 긴 시간 논의를 이어왔다. KKR이 지분 인수 후에도 오너 일가의 경영권을 보장하고, 수년 후 지분을 되사올 수 있는 바이백(Buyback) 조항 등을 포함한 논의도 이뤄졌다. 그러나 이 역시 신 회장이 모녀 측과 손을 잡으면서 지지부진한 모습이다.
거듭된 불발의 핵심은 글로벌 PEF는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있는 회사를, 그것도 지분 일부만 인수하는 딜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PEF는 추후 경영권을 통매각할 수 있을 정도의 지배력, 과반 이상의 지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형제 측이 보유한 지분은 모두 합해봐야 20%대로, 형제 입장에선 반대편에 선 모녀와 합치하지 못하면 사실상 투자 유치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