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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자보호법 개정안 국회 통과 유력
‘신중론’ 금융당국도 입장 선회
소비자 실익, 각종 부작용 상쇄할까
현행 5,000만원인 예금자보호 한도가 1억원으로 대폭 상향될 전망이다. 여야가 한도 상향을 골자로 한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하면서다.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진 가운데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자는 데 뜻을 모은 것이다. 시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저축은행으로 대규모 ‘머니 무브’가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2001년부터 23년간 ‘5,000만원’ 제자리
14일 정치권에 따르면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원회 의장과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전날 국회에서 만나 예금자보호법 개정안 처리에 뜻을 모았다. 진 의장은 “예금자보호법 등 민생을 위한 법안은 지금이라도 수용 가능하다는 데 (양당의) 의견이 같았다”고 밝혔다. 양당이 합의함에 따라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을 비롯한 6개 민생법안은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 전망이다.
예금자보호는 은행 등 금융기관이 파산했을 때 고객이 맡긴 돈을 일정 한도 내에서 보장해 주는 제도다. 예금보험공사가 금융사로부터 예금 보험료를 걷어 적립하고, 이후 금융사가 예금 지급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해당 금융사를 대신해 소비자에게 예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2001년까지 2,000만원이던 한도는 5,000만원으로 인상된 후 23년째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 이에 시장에서는 소비자들의 자산 규모 변화를 반영해 한도를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어 왔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공포가 커지면서 금융 안전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예금자보호 한도를 초과하는 예금에 대한 대규모 인출 사태가 일어나면 시장의 불안정성 또한 가속할 것이란 우려에 따른 것이다. 주요국에서 예금자보호 한도를 높게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예금자보호 한도는 25만 달러(약 3억5,000만원)로 우리나라의 7배에 달하며, 영국(8만5,000파운드·1억5,200만원)과 일본(1,000만 엔·약 9,000만원) 또한 한국에 비해 2배가량 높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대비 은행업권의 보호 한도 비율 역시 우리나라는 1.2배로 미국(3.1배), 영국(2.2배), 일본(2.1배) 등 주요국과 비교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이번 개정안 처리에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예금자 보호 한도 상향을 반대하던 금융당국이 입장을 선회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금융위원회가 최근 윤한홍 정무위원장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금융위 역시 한도 상향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다만 저축은행 건전성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구조조정 상황 등을 고려해 순차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은 법 개정안이 처리되더라도 3년간의 유예기간을 둬 2028년부터 한도를 1억원으로 상향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보호 한도를 법률로 명시하기보다 시행령으로 정해 시장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도 밝혔다. 향후 정무위는 기존에 발의된 법안들을 바탕으로 금융당국의 입장을 반영해 최종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여당 관계자는 “예금자보호 한도를 높이되, 당국 의견에 따라 시행을 내년 이후로 정하는 방안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자 실익 미미, 예보료 부담 전가 위험까지?
금융위를 비롯한 금융당국이 예금자보호 한도 상향에 신중한 데는 그에 따른 혜택이 일부 자산가들에게만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가 짙게 작용했다. 국제예금보험기구협회(IADI)는 예금자보호 한도 관련 지침에서 예금자 90~95%가 보호돼야 한다고 권고했는데, 한국은 업권에 상관없이 현행 한도 내에서 보호받는 소비자 비중이 IADI의 권고치에 부합한다는 게 금융당국의 입장이다.
지난해 9월 기준 소비자 보호 비중은 은행 97.8%, 금융투자 99.7%, 생명보험 93.9%, 손해보험 99.4%, 종합금융 94.1%, 상호저축 97.2% 등에 달했다. 전체 예금 보유자 가운데 잔액이 5,000만원을 넘는 사람은 100명 중 5명도 안 된다는 의미다. 이에 금융위는 지난해 예금자보호 한도를 현행 유지한다는 입장을 밝힌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하며 “한도 상향의 편익은 소수의 예금자에만 국한될 수 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예금자보호 한도 상향으로 예보료율이 올라갈 경우 금융기관의 보험료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점도 신중론에 힘을 실었다. 예금자보호 한도가 높아지면 금융사는 그만큼 더 많은 보험료를 예보에 내야 하는데, 이렇게 올라간 보험료 부담은 결국 소비자에게 대출 이자율 등으로 전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한 금융권 관계자는 “예보료 상승 등 사업비용 증가에 따른 수익 하락은 역마진 등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며 “예보료율을 먼저 조정하는 등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형 저축은행만 유리할 것” 지적도
시장에선 예금자보호 한도가 상향되면 대규모 자금 이동이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5,000만원씩 여러 은행에 쪼개 저축하던 소비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를 찾아 저축은행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예금자보호 한도를 5,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올릴 경우 저축은행 예금이 현재보다 16~25% 증가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문제는 이같은 대규모 자금 이동이 각종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먼저 저축은행으로 단기간 많은 자금이 이동할 경우 자본 대비 예금의 규모가 급증해 저축은행의 자기자본(BIS)비율 하락이 불가피하다. 총자산 중 자기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BIS비율은 은행 등의 안정성을 평가하는 지표로 활용되며, 국제결제은행은 이를 최소 8% 이상으로 유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저축은행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자금 능력이 좋은 대형 회사만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는 이유다.
금융당국의 우려처럼 높은 예보료율 또한 저축은행들에는 부담이다. 이미 저축은행은 다른 업권에 비해 높은 예보료율을 적용받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예금자보호법상 저축은행은 예금 잔액 대비 0.4%를 예보료로 납입하는데, 이는 은행(0.08%)이나 증권사·보험사(0.15%)와 비교해 최대 5배 높은 수준이다.
아울러 저축은행 업권에서 예금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며 과도한 금리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예금자보호 한도가 높아지면 재무 건전성이 좋지 않은 금융사도 고금리 경쟁에 가담하게 되고, 예금자에게 더 많은 이자를 지급하기 위해 고위험·고수익 투자를 늘릴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예금자보호 한도가 상향되면 저축은행의 수신액이 증가할 것은 자명하다”며 “이 경우 저축은행도 시중은행만큼의 건전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