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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달러당 120루블'을 넘어서며 가치 급락 전쟁 전 70~80루블에서 100루블 '뉴노멀' 돼 외화 수입 늘고 전쟁비용은 줄어 푸틴에 호재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32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쟁 이전 달러당 70~80루블에서 크게 상승해 심리적 저지선이었던 '달러당 100루블'을 넘어섰다. 지난달 러시아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한 데 이어 최근 미국 정부가 러시아산 천연가스 거래의 핵심 역할을 하는 러시아 은행을 제재하면서 루블화 가치 하락을 부추겼다는 분석이다. 다만,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천연가스, 우라늄, 니켈, 티타늄 등 러시아산 전략 원자재의 수출에는 호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美 정부 '가스프롬 은행 제재'에 루블화 가치 급락
27일(현지 시각) 러시아 리아노보스티 통신은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이날 한때 1달러당 120루블을 넘어서며 32개월 만에 최저치로 폭락했다고 보도했다. 루블·달러 환율이 달러당 120루블을 넘어선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 개시 초기인 2022년 3월 22일 이후 처음이다. 이날 루블화는 달러당 107.98루블로 거래를 마쳤다. 전쟁 이전 루블화는 달러당 70~80루블 선에서 거래됐지만, 이제는 100루블 이상이 뉴노멀이 되면서 러시아인들의 심리적 저지선이 '달러당 100루블'로 무너졌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루블화 가치 하락은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서방의 긴장이 고조된 영향이 크다. 전쟁 이후 러시아 최대 수출 품목인 석유와 천연가스의 판매 통로가 막히면서 루블화 수요가 감소했고 러시아의 무역수지도 악화했다. 여기에 미국이 지난 21일 러시아 가스프롬 은행을 비롯해 118개 러시아 금융기관을 제재 명단에 포함하면서 루블화 약세가 가속했다.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의 자회사인 가스프롬은행은 러시아와 유럽 국가 간 천연가스 거래 결제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또 20%대의 높은 이자율을 내건 러시아 은행의 예금 상품에 자금이 몰리면서 러시아 주식시장이 올해 20% 이상 하락한 것도 루블화 가치 폭락에 일조했다는 분석이다. 지난달 러시아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2%포인트 올리면서 현재 기준금리가 21%의 기록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이번 인상으로 기준금리가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투입한 직후인 2022년 2월을 훌쩍 뛰어넘은 것은 물론 러시아 금융위기(1998년)의 영향이 남아 있던 2003년 2월 이후 최고치가 됐다.
루블화 약세는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치솟은 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지난달 러시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8.5%로 정부 목표치 4.0%의 2배가 넘었다. 과도한 군비 지출로 자금 흐름이 왜곡되면서 생필품 인플레이션과 고금리 등으로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다. 한때 군수산업이 활황을 보이면서 경제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갈수록 모멘텀이 떨어지면서 저성장 속에 국내 수요가 냉각되고 물가만 뛰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향하고 있다.
루블화 약세에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출 가격 하락
하지만 루블화 약세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호재가 될 수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즈(FT)는 전망했다. 예산 수입의 절반가량을 석유와 가스를 수출한 국가의 외화 대금으로 받는데 국가 재정 지출은 루블화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달러당 환율이 오르는 만큼 국가 재정의 유동성이 확대되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러시아 금융사 FG피남의 알렉산더 포타빈 애널리스트는 "러시아 정부의 방위비 지출이 막대한 상황에서 국가 예산을 채우기 위해서는 루블화의 약세가 이어져야 한다"고 분석했다.
수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루블화 가치가 하락하면 러시아산 상품이 세계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안톤 실루아노프 재무부 장관은 전날 "현재 환율은 수출에 매우 유리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루블화 가치 급락에 대한 우려를 일축했다. 그러면서 실루아노프 장관은 "인위적인 환율 개입에 나서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연말까지 루블화 가치가 달러당 115∼121루블 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유럽 천연가스 시장에서 러시아산 수입량이 미국산을 추월했다. FT에 따르면 지난 5월 유럽연합(EU)과 영국, 스위스,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에 공급된 러시아산 천연가스와 액화천연가스(LNG) 규모는 전체 수입량의 15%를 차지했다. 같은 기간 미국산은 14%에 그쳐 2022년 8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에 대해 FT는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동유럽 국가가 여전히 러시아산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유럽의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낮추는 게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중국이 유럽을 제치고 러시아 천연가스의 최대 수출 시장으로 부상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올해 1~9월 가스프롬이 파이프라인을 통해 중국에 수출한 천연가스는 전년 동기 대비 40% 증가한 237억㎥로, 같은 기간 유럽 수출량(225억㎥)을 넘어섰다. 가스프롬과 중국석유공사는 올해 안에 가스 공급량을 최대 용량까지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당초 내년 초로 예정된 최대 용량 도달 시점을 앞당긴 것이다. 또 러시아는 2027년 완공될 100억㎥ 용량의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통해 추가로 중국에 가스를 공급할 계획이다.
러 "우라늄·니켈·티타늄 등 수출 제한 고려할 것"
이렇게 러시아 정부가 루블화 가치 하락을 수출 확대 전략으로 활용하면서 '자원 무기화' 기조도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9월 11일 국무회의에서 "러시아는 천연가스를 비롯해 금, 다이아몬드 등 전략적 원자재 매장량이 가장 많다"며 "우라늄, 티타늄, 니켈의 수출에 일정한 제한을 두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방 국가들의 제재에 대한 맞대응으로 우라늄, 티타늄, 니켈 등 원자재 수출에 제동을 걸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러시아는 세계 4위의 우라늄 생산국으로 전 세계 농축 우라늄 양의 44%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산 우라늄을 가장 많이 수입한 국가는 미국(702톤)과 중국(457톤)이었으며 한국이 243톤을 수입해 그 뒤를 이었다. 전문가들은 서방 국가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 수입을 많이 줄였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우라늄 등 세계 금속 시장의 주요 공급원으로 러시아가 수출을 중단하거나 생산량을 감축할 경우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특히 미국의 경우 러시아산 우라늄이 의존도가 높다. 지난해 미국 상업용 원자로에 공급된 농축 우라늄의 27%가 러시아산이었다. 애널리스트 아르카디 게보르키안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향후 2~3년간은 러시아산을 대체하기는 정말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서구 농축 업체가 추가 농축 능력을 구축할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대체하려면 최소 3년이 걸릴 것"이라며 "다만, 중국에서 저농축 우라늄을 수입해 부분적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의 정제 니켈 생산업체인 노르니켈도 러시아 기업이다. 노르니켈은 현재 유럽과 중국에 니켈을 대량 공급하고 있는데 미국과 영국 주요 거래소에서 더 이상 러시아산을 거래하지 않음에도 세계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 또 러시아는 티타늄 스펀지의 세계 3위 생산국이기도 하다. 캐나다는 러시아의 티타늄 스펀지 제조업체 VSMPO-아비스마를 제재 대상에 올리면서도 에어버스가 러시아산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러시아 세관에 따르면 러시아산 니켈의 가장 큰 구매자는 프랑스, 중국, 독일이며 미국도 여전히 러시아산 티타늄을 구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