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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매체에 민사소송 제기 CBS에도 100억 弗 소송 걸어 언론사 압박해 ‘자기검열’ 우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언론사들을 상대로 잇따라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 측은 소송을 제기한 이유로 틀린 여론조사를 공표했다거나 상대 후보였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인터뷰를 자의적으로 편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소송은 결과와 관계없이 언론사에 거액의 소송비 부담을 안겨주는 만큼 사실상 언론사를 압박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언론이 대선 개입" 명예훼손 소송
25일(이하 현지시간) CNN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16일 공화당 우세 지역이었던 아이오와에서 해리스 부통령이 역전했다는 여론조사를 발표했던 지역 유력지 '디모인 레지스터(Des Moines Register)'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디모인 레지스터는 지난달 5일 대선 직전 아이오와에서 해리스 부통령이 47%의 지지율을 얻어 트럼프 당선인(44%)을 오차 범위 내에서 앞섰다고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아이오와에서 13%포인트 이상 앞섰던 트럼프 당선인은 디모인 레지스터와 그 모회사, 그리고 해당 여론조사를 수행한 언론인 J 앤 셀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소장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 측은 여론조사 결과에 '의도'가 개입됐다며 이 매체가 선거에 개입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잘못된 조사 결과로 쉽게 승리할 수 있는 지역에 선거자금을 더 투입했고, 유권자들도 속았다며 배상을 요구한 것이다.
언론사를 상대로 한 트럼프 당선인의 소송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올해 대선 직전 해리스 부통령과의 인터뷰를 문제 삼으며 CBS뉴스에도 100억 달러(약 14조6,000억원) 가액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CBS가 인터뷰 내용을 트럼프 측에 불리하게끔 편집했다는 주장으로, 디모인 레지스터에 대한 것과 유사한 법 조문을 동원했다.
트럼프에게 무릎 꿇은 ABC, 219억원 배상 합의
이에 언론계에서는 거액의 소송이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질적인 권력이자 막대한 부를 차지하고 있는 트럼프 당선인으로부터 소송을 당하면 결과와 관계없이 언론사에는 엄청난 부담이 지워질 수밖에 없어서다. 이는 결국 언론사들의 '자기검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소송 과정에서 트럼프 당선인에게 사실상 백기 투항하는 언론사도 있었다. 트럼프 당선인으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지상파 방송 ABC는 최근 트럼프 측이 제기한 소송을 종결하는 조건으로 1,500만 달러(약 219억원)의 합의금을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트럼프 당선인의 28년 전 성추행(sexual abuse) 혐의 사건을 ABC 앵커 조지 스테퍼노펄러스(George Stephanopoulos)가 "법원이 '성폭행(rape)'을 인정했다"고 여러 차례 표현함에 따라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제기한 소송이었는데, 결국 ABC는 합의금을 지불키로 하는 동시에 유감을 표명하는 사과문을 냈다. 뿐만 아니라 ABC를 소유한 월트디즈니는 소송에 들어간 법률 비용 100만 달러(약 14억6,600억원)도 트럼프 당선인에게 지급해야 했다.
美 법원, 허위보도 언론사에 징벌적 배상 선고
이를 두고 일각에선 트럼프 2기 행정부 하에서 방송 사업자 재승인 등 연방 정부의 결정으로 사운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상황에서 ABC가 살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공인의 명예 훼손에 관해서는 원고가 ‘실질적 악의’를 입증해야 한다는 게 미국 법원 판례기 때문이다. 해당 언론사가 보도 내용에 명예를 훼손하는 거짓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거나, 보도의 진위를 무모할 정도로 무시했다는 점을 원고가 입증하면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198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가해 언론사는 피해자에게 30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포함해 총 40만 달러(약 5억8,600만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한 '거츠 대 로버트 웰치 사건(Gertz vs Robert Welch) 사건이 대표적이다. 해당 사건은 시카고의 인권변호사 엘머 거츠가 자신에 대해 "산업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 연맹의 간부로서 이 단체는 미국 정부를 폭력으로 점거하는 것을 옹호한다"고 허위 보도한 지역 언론사를 상대로 낸 소송이었다.
당시 2심을 맡은 연방고등법원은 "해당 언론사가 명예를 훼손하는 문구를 사전에 거의 확인 해보지도 않고(주의 태만), 극우성향을 가진 작가의 글을 근거로 명예훼손적 정보를 추가로 덧붙였으므로 실질적 악의에 해당한다"며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했고, 최종심인 연방대법원도 이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연방대법원은 판결에서 "공적 인물은 언론보도 등 명예훼손적 표현이 실질적 악의를 갖고서 공표됐음을 증명하지 않으면 터무니없고 추잡한, 고의적인 풍자로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다"고 판시했다. 사적 인물 역시 큰 액수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선 언론사의 실질적 악의를 입증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한 뉴욕주 변호사는 "1990년대 미국 법원이 선고한 징벌적 손해배상 규모는 지금으로 치면 거의 1억 달러에 육박하는 수준"이라며 "최근에는 거액의 징벌 배상액과 소송비용, 긴 소송 기간 등을 고려해 소송 전에 당사자끼리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