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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버블 붕괴 이후 저축과 부채 상환에만 집중 기업들 ‘대출 기피’로 정부가 통화정책 통해 ‘민간 투자 대행’ 천문학적 정부 대출, 경기 활성화 시 ‘치명적 영향’ 줄 수도
[동아시아포럼] 섹션은 EAST ASIA FORUM에서 전하는 동아시아 정책 동향을 담았습니다. EAST ASIA FORUM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Australia National University) 크로퍼드 공공정책대학(Crawford School of Public Policy) 산하의 공공정책과 관련된 정치, 경제, 비즈니스, 법률, 안보,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분석 플랫폼입니다. 저희 폴리시 이코노미(Policy Economy)와 영어 원문 공개 조건으로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일본의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 기업과 가계의 부채 상환 집중으로 발생하는 경기 침체)은 1990년 자산 버블 붕괴로 시작해 20년 넘게 이어졌다. 해당 기간 기업과 가계는 빚을 갚고 저축을 늘리는 데만 온전히 몰입했는데, 특히 일본의 비금융 기업 부문은 부채 비율 축소를 위해 낮은 이자율에도 대출을 최소화하고 회계상 흑자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같은 ‘부채 기피’는 일본 정부가 통화 정책의 효과성과 재정 적자 감축 목표를 희생하지 않고 경제 성장과 자금 수요 증가를 끌어내는 데 장애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 버블 붕괴 이후 ‘차입 축소’가 경기 침체 원인
일본은 1990년 부채로 부풀려져 온 버블이 붕괴하며 20년 넘게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에 시달렸다. 버블의 규모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도쿄 시내 임페리얼 팰리스 가든(Imperial Palace Garden)이 캘리포니아주 전체 가치와 맞먹을 정도였다. 이렇다 보니 기업과 가계가 진 빚을 갚고 이를 저축으로 채우는 데도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누군가 저축을 하고 빚을 갚고 있다면 누군가는 그 저축을 빌리고 소비해야만 경제가 돌아간다는 점이다. 1990년까지만 해도 일본 기업이 가계 저축을 빌려 투자한 금액은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12%에 달했다. 하지만 이후 급격한 대출 축소로 2003년에는 기업들 자체가 GDP의 11%에 이르는 저축 보유자가 됐고, 해당 기간 GDP의 23%에 상당하는 기업 대출 및 자금 수요 감소는 고스란히 경기 침체로 직결됐다.
당시 그 어떤 경제학자도 민간 부분이 수익 극대화 대신 ‘부채 최소화’에 주력하는 것이 경기 침체를 부를 수 있다고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이에 대응해 재정 지출을 늘려 민간 부문 잉여 저축을 경제 부문으로 재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정부 지출은 일본 GDP가 이후 30년 동안 버블 최고점 아래로 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데 일부 기여했다. 해당 기간 급격한 자산 가치 하락으로 1989년 GDP의 세 배에 해당하는 국부가 사라진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업적으로 볼 수도 있다. 미국의 경우 대공황(Great Depression) 때 명목 GNP(Gross National Product, 국민총생산)의 46%가 줄어들었는데, 이는 1929년 GNP 1년 치에 해당한다.
기업들 대출 기피로 정부가 양적 완화 통한 ‘민간 투자 대행’
일본 기업들의 부채 상환이 마무리에 접어든 시점은 2012년이다. 일본 정부는 규제 완화와 기업 지배 구조 개선, 민영화를 밀어붙였고, 비자 조건을 완화해 일본을 찾는 관광객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여기에 수입과 해외 인력 진출까지 개방함에 따라 일본은 30년 전 수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상품과 노동자 유입을 경험하게 됐다.
그러나 일본의 비금융 기업 부문은 지금까지도 저금리, 건전한 재무 구조, 우호적인 금융 환경에도 불구하고 차입을 허용하지 않는 ‘흑자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부채 상환 경험이 기업들의 ‘부채 기피 성향’을 키운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 다수의 일본 기업은 현금흐름 경영(cashflow management)에 매달리는데, 이는 자본 지출(capital expenditure, 건물·장비 등 자본재 구입을 위한 지출)을 포함한 모든 자금 수요를 현금흐름 내에서 해결한다는 의미로, 대차대조표 불황에 대처하는 전형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대공황 때 혹독한 부채 해소(deleverage) 과정을 겪어야 했던 미국인들도 대출 기피 현상을 보인 바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본 기업은 여기에 더해 그나마 있는 자금 수요도 더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는 신흥 시장 투자를 위해 해외에서 해결한다. 아직도 정부가 민간 저축 잉여금을 직접 대출받아 시장에 공급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일본, 서비스 산업 중심 자금 수요 증가 및 경제 성장 가능성
일각에서는 일본 경기 침체가 노동 가능 인구 감소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1995년에 최고점을 찍고 지금까지 15% 정도 감소한 것은 맞다. 단, 이러한 관점은 일본이 여성 및 노인 인구의 경제 활동 증가로 현재 사상 최고의 취업자 수를 기록하는 현실을 간과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이 안정적인 물가 및 임금을 유지한 채 작게나마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일본 노동 시장의 유연성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노동 시장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면서 일본은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심각한 인력난을 겪는 중이다. 이는 일본 서비스 기업들이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해 자금 대출 및 투자를 실행한다면 일본 경제가 다시 성장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경우 일본 정부 역시 대차대조표 불황 시작 이래 처음으로 재정 적자 축소를 시도하는 동시에 전반적인 일본 경제도 정상화될 수 있다.
금리 인상 시 정부 부채 이자 부담 '천문학적'
다만 이 같은 경제 정상화 가능성은 통화 정책 측면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앞서 일본 중앙은행이 2013년부터 실시한 대규모 양적 완화 조치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까지 인플레이션 기조를 되살리는 데 실패했으며, 대부분의 자금이 은행권을 벗어나 실물 경제에 투자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은행 시스템 안에는 474조 엔(약 4,470조원)이 잉여 준비금으로 묶여 있다. 일본 GDP의 79%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런 잉여 자금은 수요가 없다면 문제될 것도 없으나, 실제 자금 수요가 나타날 경우엔 상당한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자금 수요라는 것은 기술 혁신으로 새로운 설비나 장비 투자가 필요해지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이 현실화 하게 되면 일본은행은 금리 인상을 통해 수요를 억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여기서 474조 엔 규모의 부채에 적용되는 고금리를 일본은행이 감당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더욱이 이러한 대규모 지급 이자는 중앙은행 긴축 정책의 효과성을 저해하면서 재정 적자는 늘리는 이중의 부정적 효과를 발휘한다. 일본은행이 금리를 1% 인상하면 정부가 재정 적자 확대 방지를 위해 소비세를 2% 올려야 한다는 등식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간절히 기다려 온 자금 수요의 귀환이지만 일본은행이 통화 정책을 단계적으로 조정해 경제와 재정에 미칠 치명적인 피해를 막을 수 있도록 속도 조절이 필요해 보인다.
원문의 저자는 리처드 C. 구(Richard C Koo) 노무라 연구소(Nomura Research Institute) 수석 이코노미스트입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Borrowers nowhere to be seen as Japan enters its post-deflation era | EAST ASIA FORUM에 게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