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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채 5년물 금리 연중 최저치 기록
대환 대출 제한하고 비대면 판매 중단
‘급전 창구’ 찾아 2금융권 찾는 소비자들
지난달 한국은행이 시장의 예상을 깨고 기준금리를 인하한 가운데 은행권의 대출 금리 하락이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기준금리 인하 직전과 비교해 최대 0.19%p 내렸다. 다만 이와 같은 조건에도 은행의 대출 문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어 소비자의 체감 금리에는 큰 변화가 없을 전망이다. 전문가 사이에선 무조건적 대출 규제 이전에 근본적인 문제 인식과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나온다.
우대금리 없애고, 비대면 대출 중단
6일 금융투자협회 채권정보센터에 따르면 금융채 5년물(무보증·AAA) 금리는 지난 4일 기준 2.955%를 기록했다. 지난달 29일 2년 8개월 만에 2%대로 내려온 금융채 5년물 금리는 이달 들어 꾸준히 2%대를 유지 중이며, 지난 2일 2.904%로 연중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금융채 5년물 금리는 주담대 고정금리의 기준이 된다.
이를 반영한 은행권 주담대 금리도 일제히 하락 중이다. 2일 기준 KB국민은행의 고정금리형 가계대출 금리는 지난달 마지막 주에 비해 최대 0.19%p 내렸다. 하나은행의 주담대 혼합형 금리(은행채 5년물 지표)도 지난달 22일과 비교해 0.189%p 낮아졌으며, 신한은행의 주담대 금리는 상단 기준 0.15%p 내렸다. 은행의 대출금리는 시장금리에 은행의 자체 가산금리가 더해져 정해지는데, 벌어진 예대금리차(예금금리-대출금리)에 은행들이 가산금리를 높이기 어려웠던 것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은행권의 금리 인하가 소비자들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금융당국 가계대출 조이기가 계속되는 시중은행들이 일제히 대출 문턱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나은행은 오는 9일부터 대환 목적의 주담대, 전세대출, 신용대출 판매를 한시적으로 중단하기로 했다. 지난달 이들 상품의 비대면 판매를 한시적으로 중지한 데 이어 이번엔 대면 창구에서의 대출 취급까지 중단한 것이다.
또 우리은행은 주요 신용대출 8개 상품에 적용되는 0.5~1.4%p 우대금리를 4일부터 없애고, 신규 신용대출의 우대금리를 폐지했다. 신한은행은 지난달 6일부터 비대면 상품 전체에 대한 판매를 중단한 바 있으며, NH농협은행 또한 같은 달 15일부터 비대면 직장인 신용대출 상품에 대한 판매를 중단했다.
은행의 높은 대출 문턱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그간 금융 당국이 가계부채 관리 기조를 이어온 탓에 은행들은 가산금리 인상, 대출한도 축소 등을 통해 대응해 왔는데, 최근의 금리 인하가 자칫 가계부채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간신히 잡은 가계대출 증가세를 다시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다. 금융권 관계자는 “낮은 금리를 찾아 은행을 옮기는 수요가 대출 문턱이 낮은 은행으로 쏠릴 경우 그동안 관리해 오던 가계부채가 다시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은행들이 서로 관리 강화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며 “금리가 낮아지는 것보다 대출 문턱이 더 높아지면서 신규 대출자들의 어려움은 더 극심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달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733조3,387억원으로 전월 대비 1조2,575억원 늘어나는 등 8개월 연속 상승 곡선을 그렸다. 다만 월별 증가 폭은 4월 4조4,346억원, 5월 5조2,278억원, 6월 5조3,415억원, 7월 7조1,660억원, 8월 9조6,259억원, 9월 5조6,029억원, 10월 1조1,141억원으로 축소됐다.
‘울며 겨자 먹기’ 고금리 생계형 대출 늘어
높아진 시중은행의 대출 문턱을 넘지 못한 신규 대출자들은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다. 먼저 1금융권에 예금이나 적금을 보유한 소비자들은 이를 담보로 대출을 받는 사례가 늘었다. 지난달 7일 기준 5대 시중은행의 예적금담보대출 잔액은 6조2,713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 3월 말(5조8,615억원) 대비 4,098억원 증가한 규모다.
예적금담보대출은 예금과 적금, 청약통장 등 수신 상품에 맡긴 금액의 최대 95%를 융통할 수 있는 상품이다. 수신 상품 금리에 1~1.5%p를 더한 4%대의 금리가 적용되며, 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받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대출 심사가 간단하고 정부의 대출 관리 규제에서 벗어나 있어 급전이 필요한 소비자들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게 은행권의 설명이다.
담보로 제공할 예적금마저 없는 경우는 높은 금리에도 불구하고 2금융권 등을 찾을 수밖에 없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10월 기준 카드·캐피털사 등 여신전문금융사의 가계대출 잔액은 9,000억원 증가했다. 특히 카드론과 보험계약대출, 저축은행 신용대출 위주의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이들 대출은 서민층의 ‘급전 창구’로 꼽힌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경기 침체로 폐업 위기에 처한 소상공인 및 자영업자들이 최후의 보루인 카드론, 보험계약대출 등을 통해 자금을 융통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해 2금융권 관계자는 “최근 실행되는 대출의 상당 부분은 생계형 대출이다”라며 “2단계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도입으로 은행에서 주담대를 받지 못해 소위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으다)’을 위해 2금융권을 찾는 수요가 늘었다고만 판단해선 안 될 문제”라고 지적했다.
무조건적 금융권 규제, 성공 어려워
전문가들은 무조건적 대출 규제가 능사는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당장 내년 하반기부터 스트레스 DSR 3단계가 예고됨에 따라 지금이라도 서둘러 미리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소비자들 사이에 확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꽉 닫힌 은행의 대출 통로를 벗어나 지방은행, 인터넷은행, 2금융권으로 대대적인 ‘풍선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앞서 금융당국은 1단계 정책에서 스트레스 금리 25%를 적용했고, 지난 9월 시행된 2단계 정책에선 50%까지 상향했다. 내년 7월 스트레스 DSR 3단계가 적용될 시 스트레스 금리는 100% 적용돼 대출 한도 또한 지금보다 더욱 줄어들게 된다. 예컨대 연봉 6,000만원의 근로소득자가 수도권 주택 구매를 위해 30년 만기 연 4% 변동금리 대출을 받을 때, DSR 2단계에선 스트레스 금리 1.2%가 적용돼 3억6,400만원의 대출을 받을 수 있는데, 3단계 시행에선 스트레스 금리 1.5%가 더해진 5.5%로 올라가면서 대출 한도 또한 3억5,200만원까지 줄어들게 된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금리를 낮추는 와중에 금융권 규제를 통해 대출을 줄이고 있지만, 이는 성공하기 어려운 정책”이라고 짚으며 “풍선효과에서 볼 수 있듯 결국 부동산 가격 자체가 잡히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집값은 시장의 원리에 맡기고 정부는 서민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 적극적인 공급 대책을 내놔야 한다”며 “조기에 공급량을 늘려 주택가격을 안정화하고, 집값을 감당하기 위해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차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