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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등법원, 동성 간 결혼 인정 판결 잇달아 정부 유보적 입장에도 사회적 분위기는 합법화가 ‘대세’ 대법원 확정판결까지는 시간 걸릴 것
[동아시아포럼] 섹션은 EAST ASIA FORUM에서 전하는 동아시아 정책 동향을 담았습니다. EAST ASIA FORUM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Australia National University) 크로퍼드 공공정책대학(Crawford School of Public Policy) 산하의 공공정책과 관련된 정치, 경제, 비즈니스, 법률, 안보,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분석 플랫폼입니다. 저희 폴리시 이코노미(Policy Economy)와 영어 원문 공개 조건으로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올해 일본의 주요 고등법원(high courts) 세 곳에서 동성 간 결혼(same-sex marriage)을 헌법상 권리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는데 이는 일본의 전통적 가족 개념과 사회 규범의 획기적 변화를 의미한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동성 결혼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가족의 정의를 바꿀 것’이라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다수의 여론이 동성 결혼을 지지함은 물론 많은 지자체와 기업들도 해당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일본은 동성 간 결혼을 이미 합법화한 30여 개 국가들의 대열에 한 발짝 다가선 것으로 보인다.
일본 고등법원, 연이어 ‘동성 결혼 합법화’ 판결
지난 13일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후쿠오카, 도쿄, 삿포로 고등법원 등 일본의 주요 고등법원이 연달아 동성 간 결혼의 헌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해당 판결들은 일본 최고재판소(Supreme Court)에서 다뤄질 것으로 예상되는 동성 결혼 관련 소송의 중간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일본 전후 헌법(postwar constitution)에 ‘개인 존엄성’, ‘법적 평등’, ‘결혼의 자유’ 등을 명시해 일본 사회 구조의 변화를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일본 사회는 역사적으로 국가 정체성의 핵심을 구성해 온 전통적 가족 개념을, 변화하는 사회정치적 규범에 맞게 적응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일본은 G7 회원국 중 이탈리아와 함께 동성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다.
일본 사회의 보수성은 여성이 결혼 후 원래 성씨를 유지할 권리를 일본 최고재판소가 ‘헌법적 보호 범위 밖에 있다’고 판결한 것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일본은 최근까지 부부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재혼하려면 일정 기간이 지나야 가능했는데 재혼 후 출산한 자녀의 친부를 명확히 하는 것이 법의 목적이었다. 일본 최고재판소가 지지해 온 이 법은 올해 들어서야 국회에 의해 폐지됐다. 이 모든 판결에서 법원은 ‘현존하는 법체계 내에서 가족을 정의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고, 동성 결혼 역시 정확히 이 범주에 들어간다.
여론과 지자체, 기업도 ‘동성 결혼 찬성’
전통적으로 일본의 ‘소송 행동주의’(plaintiff activism, 소송을 통해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운동)는 정부의 무책임과 무대책을 시정하려는 개인적, 지엽적인 노력으로 여겨져 왔고, 광범위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전국 규모의 소송은 최근에야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2019년 밸런타인데이에 일본 전국에서 제기된 결혼 관련 소송은 일본을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30여 개 국가 그룹에 합류시키려는 사회적 가치의 변화를 대변했다. 시간이 또 지난 현재 일본 여론은 다수가 동성 결혼을 지지하고 있다.
삿포로 고등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일본의 1,700여 개 지방자치단체 중 전체 인구의 65%를 차지하는 260개의 지자체가 동성 커플의 결혼으로 인한 권리를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는 공식적 법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기업들의 수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일본 정부 역시 이러한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는데, 일본 내 사회적 파장에 상관없이 해당 이슈는 글로벌 시장에서의 일본 위상은 물론, 비슷한 사회적 변화를 경험하는 글로벌 노동 인력 사이에서 일본의 매력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자국에서 동성 결합(same-sex unions)을 인정받는 커플을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들도 동성 결혼 관련 소송 운동의 당사자들이다.
전통적 가족 규범과 사회적 변화 사이 ‘간극 메우기’
아직까지 일본 정부는 동성 결혼이 헌법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 ‘자기 결정권’(right to self-determination)의 요건을 충족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동성 결혼이 현행법 제도의 영역을 벗어난 새로운 법체계를 구성한다는 논리에서다. 해당 관점에 따르면 동성 결혼은 현재 결혼제도가 갖는 ‘출산과 양육의 중요성’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가족의 정의를 변화시키는 셈이다.
3개 고등법원을 포함해 점점 더 많은 일본 법원이 동성 결혼의 합법성을 인정하려는 것은 이러한 전통적 가족 규범과 사회적 변화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등법원의 인정 판결은 5개의 하급 지방법원(district courts) 간 견해 차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의미 있는 진전으로 여겨진다. 현재 오사카 지방법원은 동성 결혼 금지를 합헌으로 보고 있으며, 다른 두 지방법원은 조건부 합헌, 또 다른 두 법원은 위헌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본 법원은 기존 법령을 뒤집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에 사회적 이슈에 대한 헌법 소송 역시 입법 기관의 의무 불이행에 대한 손해 배상 소송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현재 진행 중인 동성 결혼 소송도 일본 국회가 사회적 변화를 헌법에 반영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하지 않았다는 과실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런데 해당 소송은 법원이 기존 법을 무효화할 필요 없이 결혼 제한의 합헌성 문제를 다룰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대법원, 동성 결혼 인정해도 ‘사회적 합의 시간’ 주문 예상
그런 이유로 3개 고등법원이 현재 법을 위헌으로 판결하면서도 손해 배상 소송을 각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법원은 사안의 복잡성과 대안에 대한 합의가 명확히 이뤄지지 않은 사실로 볼 때 국회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또한 위헌성을 발견했다 해도 국회의 불활동(inaction)이 ‘장기간 극악하지’(egregious and prolonged) 않다면 확정적 행동을 취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따라서 일본의 동성 결혼 금지법은 국회의 입법이나, 변화 압력을 지속시키려는 소송이 없다면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 최고재판소는 ‘개인이 관계를 형성하고 관계 안에서 살아갈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고 인정한 바 있다. 또한 성씨 관련 판결의 보충 의견(concurring opinion)은 ‘법체계에서 봤을 때 결혼한 커플의 관계는 비록 두 사람으로 구성된다 해도 가족 구조의 일부를 형성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판결을 감안할 때 일본 최고재판소가 동성 결혼도 동일한 관점에서 해석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아직은 명확하고 온전한 대중적 합의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이전과 같이 국회의 입법을 우선시하는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 비록 최고재판소가 동성 결혼의 합헌성에 대한 고등법원의 판결에 동의한다 해도 말이다.
원문의 저자는 이시즈카 노부히사(Nobuhisa Ishizuka) 컬럼비아대학교 법학대학원(Columbia Law School) 강사입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Judicial action nudging Japan towards marriage equality | EAST ASIA FORUM에 게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