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EU 집행위원회, 英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 브렉시트 협정 내 '자유 이동권' 관련 규정 위반해 자유 이동권에 불만 품던 英, 브렉시트 이후 '역풍'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영국을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영국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협정에 규정된 이른바 ‘자유 이동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EU 측은 일부 EU 시민이 영국 체류 자격을 거부당하거나, 영국 내에서 비합법적 체류자로 분류돼 추방 위기에 몰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英, 브렉시트 협정 위반했다?
17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EU 집행위는 “영국이 브렉시트 협정 발효 이후 영국에 거주하는 EU 회원국 국민들의 권리를 충분히 보호하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라 영국을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고 15일 밝혔다. 영국이 브렉시트 협정에서 적시한 시민권 관련 조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EU 집행위 측의 주장이다.
브렉시트 협정에는 양측 시민들의 자유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규정이 존재한다. 해당 규정은 브렉시트 협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던 부분으로, 브렉시트 이전에 영국에 거주하던 EU 시민들이 영구 체류 권리를 신청할 수 있고 EU 회원국에 거주하던 영국 시민들도 유사한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EU 집행위는 브렉시트 협정의 해당 규정에도 불구하고 일부 EU 시민들이 영국 정부로부터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거부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브렉시트 이전부터 영국에 살던 EU 시민 중 일부가 비합법적 체류자로 간주돼 추방 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브렉시트 발효 이전 영국에는 300만 명에 육박하는 EU 시민권자가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민자 몰려든다" 영국의 입장
전문가들은 영국이 과거부터 자유 이동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해 왔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 전문가는 "영국은 몰려드는 이민자를 우려하며 EU 역내 자유 이동권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 왔다"며 "10여 년 전에는 자유 이동권 개정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지난 2013년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영국 총리는 '인구 대이동'을 제한하기 위해 새 회원국 인가 협상 시 적용되는 기준을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 이동권을 부여하기 전 GDP(국내총생산), 급여 수준 등 후보국의 경제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캐머런은 브렉시트 관련 협상이 이어지던 지난 2019년에도 유사한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영국인들은 경제보다는 (이민자들의) 자유로운 이동에 관한 염려가 컸고, 결국 주권 문제로 번졌다”며 이민자 문제를 브렉시트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당시 영국은 EU 내에서 이민자가 두 번째로 많은 나라였다. 영국 내에서 브렉시트를 주장한 진영 역시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면 무분별한 이주자 유입을 억제하고, 체류 중인 외국인의 상당수를 돌려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EU 측은 이동의 자유가 EU 단일 시장의 필수 요건이라는 주장을 고수해 왔다. 지난 2019년 도날트 투스크 당시 EU 상임의장은 “27개 회원국은 단일 시장이 ‘자유로운 이동’을 필요로 한다는 데에 명확하게 동의했다”고 강조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당시 프랑스 대통령 역시 “영국이 유럽의 단일 시장 접근을 원한다면 반드시 EU의 규정을 따르고, 분담금을 내야 한다”며 역내 자유로운 이동이 단일 시장의 전제 조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브렉시트의 '역효과'
자유 이동권을 두고 잡음을 빚던 양 측은 브렉시트 이전 EU 역내와 영국에 거주하던 이들의 영구 체류권을 보장하는 것에 합의했고, 영국은 2020년 1월 31일 EU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했다. 문제는 EU에서 탈퇴한 이후로도 영국의 이민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영국으로 들어온 순이민자 수는 74만5,000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전 해인 2016년 순이민자 수(37만 명)와 비교했을 때 두 배가량 급증한 수준이자, 당초 영국 정부의 예상치(60만 명) 대비 25% 많은 수치다.
영국 이민자가 급증한 것은 영국의 저임금·단순 노동력 시장을 지탱했던 동유럽 이민자들이 대거 이탈하고, 이 자리를 인도·파키스탄·나이지리아 등 과거 영국 식민지였던 영연방 국가 출신들이 메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 영국 내 인도 이민자는 2013년 3만3,000명에서 2023년 25만3,000명으로 8배가량 폭증했다. 반면 EU 국가 출신 이민자는 2022년에만 5만여 명이 이탈했다.
이에 영국에서는 브렉시트가 '악수'였다는 여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지난해 2월 글로벌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영국민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영국민의 60%가 “지금 다시 브렉시트 지속 여부에 관한 국민투표가 열린다면 EU 복귀에 찬성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유고브가 같은 해 6월 실시한 동일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8.2%가 EU 복귀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