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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총재, 정치와 경제 정책의 분리 언급 한은의 '독립성' 강조한 발언으로 풀이돼 신흥국 위기 가중되는 가운데 한국 시장은 안정 조짐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국내 금융·외환 시장이 안정세에 접어들고 있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한국 경제 시스템의 '독립성'이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발생한 시장 충격을 흡수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브라질을 비롯한 여타 신흥국 시장의 시장 위기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을 고려, 한은이 위기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했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이창용 "국내 시장 점차 안정세"
이 총재는 18일 오후 한은 별관에서 개최된 2024년 하반기 물가설명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내 금융·외환시장의 변동성이 크게 확대되었다가 최근 들어 점차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경제 정책이 정치 프로세스와 분리돼 집행되고 경제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신뢰가 유지된다면 정치적 불확실성이 일정 기간 지속되더라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의 이 같은 발언은 한은의 독립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1950년 최초 제정된 한국은행법은 한은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1960년대 초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 한은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해당 기간 위축됐던 한은의 독립성은 1987년 6.29 선언 이후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며 본격적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관치금융'의 폐해를 청산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후 1997년 한국은행법 개정을 통해 한은의 정치적 중립성이 강화됐다. 정치권력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통화 정책을 조정할 수 없도록 제한한 것이다. 이후 한은은 정치적 외생 변수보다 물가·금융 안정에 초점을 맞춰 독립적으로 통화 정책을 운용해 왔다.
한은의 독립적 행보
이 같은 한은의 독립성은 올해 8월 금리 동결 결정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지난 8월 22일 금융통화위원회는 통화정책방향 회의를 갖고 금리를 3.5% 수준으로 동결했다. 지난해 1월 기준금리를 연 3.25%에서 연 3.50%로 상향 조정한 뒤, 같은 해 2월부터 13차례 연속 동결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 이 총재는 “금리 인하가 너무 늦어질 경우 내수 회복이 지연되면서 성장 모멘텀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지만, 현 상황에서는 금리 인하가 부동산 가격 상승을 부추기고 외환시장의 변동성을 확대할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고 금리 동결 배경을 설명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한은이 정부 차원의 금리 인하 압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기준금리 동결을 결정했다는 점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7월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회의에서 “(기준금리는) 내려갈 방향밖에 없다”며 금리 인하를 종용한 바 있다. 6월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 역시 △근원물가 상승률이 최근 안정세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 △다른 국가들도 금리를 인하하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앞세워 "통화 정책을 유연하게 가져갈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발언했다.
이후 한은은 9월까지도 금리 동결 기조를 유지하며 독립적인 판단하에 움직였다. 이와 관련해 한 시장 관계자는 "당시 한은이 정부의 주문대로 금리를 조정했다면 시장은 한국의 금융 시스템이 정치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며 "한은이 최근 금리 조정 과정에서 보여준 독립성이 한국 경제에 대한 시장 신뢰를 강화하고, 정치적 혼란 속 변동성 축소를 견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신흥국 시장은 여전히 '위태'
한국 시장이 경제 시스템에 대한 시장 신뢰를 발판 삼아 점차 안정세를 되찾아 가는 가운데, 여타 신흥국 시장은 여전히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올해 신흥국 채권 투자 상품에서는 140억 달러(약 20조원)에 달하는 자금이 빠져나갔다. 신용평가사 S&P의 프랭크 길 중동·아프리카 담당 이코노미스트는 보고서를 통해 “많은 신흥국이 달러 표시 채권 시장에서 외면받고 있어 정부 부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최근 위기에 몰린 대표적인 신흥국으로는 브라질이 꼽힌다. 외신에 따르면 17일(현지시간) 브라질 헤알화의 환율은 장중 달러당 6.21헤알까지 상승(헤알 가치 하락)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브라질 중앙은행(BCB)이 긴급 개입해 환율을 6.10헤알대까지 끌어내렸으나, 이마저도 연초에 비해 약 26% 급등한 수준이다. BCB는 이번 주에만 60억 달러(약 8조7,000억원)를 외환시장에 투입했다.
환율이 치솟으면서 증시와 채권 시장도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 브라질 증시 보베스파지수의 올해 하락 폭은 헤알화 기준으로 6%에 불과하지만 달러로 환산하면 27%에 달한다. 브라질 국채 수익률(10년물 기준)도 연초 연 10%대에서 이달 연 14%대로 급등(채권 가격 하락)했고 환손실도 상당하다. FT는 “환율이 수년 전부터 폭락한 아르헨티나와 튀르키예 정도를 빼면 신흥국 채권 투자자는 두 자릿수 금리의 이자를 받아도 환율로 대부분 손실을 봤다”고 분석했다.
신흥국 시장 혼란의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관세 장벽'이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기간 자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입품에 10~20%의 보편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산에는 60%의 관세를 적용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또 당선을 확정한 후에는 내년 1월 20일 취임과 동시에 중국에 10%의 관세를 추가 부과하고, 멕시코와 캐나다에는 각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역시 이 같은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계엄·탄핵 정국에서 기인한 불확실성과 트럼프 리스크가 겹치며 시장 전반이 휘청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익명을 요구한 한 시장 전문가는 "비상계엄과 탄핵이 글로벌 금융 시장 불안을 가속한 건 맞지만, 근본적인 혼란의 원인은 트럼프발(發) 관세 폭탄에 있다고 본다"며 "브라질 등 신흥국은 여전히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같은 상황에 우리나라 시장이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비상계엄과 탄핵에 따른 영향은 일시적이었고, 한은이 미국의 관세 장벽 등 리스크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