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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크라 전쟁, 중동 갈등 등 영향으로 각국 방위비 확대 러시아發 위협에 유럽 군비 16% 급증, 독일은 최대 증가 폭 中·日 방위비 증가세에도 아시아 비중 감소, 韓은 10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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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전 세계가 지출한 방위비가 2조4,600억 달러(약 3,600조원)를 기록하며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중동 지역의 군사적 충돌 등 글로벌 안보 환경이 악화하면서 각국 정부가 국방 예산을 대폭 확대한 데 따른 결과로 분석된다. 여기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방위비 증액 기조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권의 지정학적 긴장 등도 전 세계의 방위비 증액을 가속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GDP 대비 방위비 비율도 1.94%로 확대
12일(현지시각) 영국 싱크탱크 국제전략연구소(IISS)가 발표한 '2025년 군사력 균형'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방위비 총액이 2조4,600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증가율은 7.4%로 2023년(6.5%), 2022년(3.5%)을 앞지르며 증가 폭을 키웠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방위비 비율도 1.94%로 2023년(1.8%)보다 0.14%포인트 확대됐다. IISS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째 이어지는 데다 이스라엘과 하마스·헤즈볼라 간 전쟁도 1년 넘게 계속됐다"며 "안보 환경 악화와 위협 인식의 심화로 방위비가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대부분의 국가에서 방위비가 증가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를 침공 이후 대륙 전역에 위협 인식이 높아진 유럽은 전년 대비 11.7% 증가한 4,570억 달러를 기록하며 10년 연속 증가세를 이어갔다. 러시아는 구매력 평가 기준(Purchasing Power Parity, PPP) 방위비가 GDP의 6.7%인 4,620억 달러로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전체 방위비(4,570억 달러)보다 많았다. 독일은 전년 대비 23.2% 늘어난 860억 달러를 방위비로 지출해 영국(811억 달러)을 제치고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세계 4위가 됐다. 미국은 9,680억 달러로 러시아의 2배가 넘었다.
아시아 국방 예산은 중국의 군 현대화와 남중국해의 갈등 고조,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 진전 등으로 지역의 위협 인식을 고조시키면서 완만하게 증가했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일본의 지출이 상당히 늘어난 것도 특징으로 꼽았다. 중국의 증가율은 7.4%로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 평균 상승률(3.9%)을 앞질렀다. 한국(439억 달러)은 세계 10위권으로 아시아에서는 중국·인도·일본에 이어 4위에 올랐다. 세계 방위비 지출에서 아시아의 비중은 다른 지역이 더 크게 증가하면서 2021년 25.9%에서 2024년 21.7%로 감소했다. 실질적인 증가가 없었던 유일한 지역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로 전년 대비 3.7%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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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전쟁 장기화로 올해 방위비 증액
이어 IISS는 향후 방위비 전망과 관련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가능성에 주목했다. 보고서는 "전쟁의 양상이 소모적인 육상전으로 변질되면서 양측 모두 단기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면서도 "다만 러시아의 경우 전쟁을 최소 1년 더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전쟁에 필요한 군 병력 규모를 확보·유지하는 데도 러시아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며 "우크라이나는 이미 인적 자원의 해외 도피가 심각한 상황으로 이번 주부터 18~24세 청년층을 대상으로 입대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군사력의 손실 규모를 고려하면 러시아의 상황도 그리 유리하지만은 않다. 러시아는 지난해 1,400대의 전차를 잃었고 전쟁 발발 이후부터 현재까지 총 4,400대의 주력 전차를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무기 생산 속도가 느려 파괴된 전차를 교체하지 못한 채 냉전 시대의 비축 전력을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는 1950년대 생산된 장갑차와 1960년대 전차를 전장에 투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IISS의 육상전 선임 분석가인 벤 배리 연구원은 "양측이 휴전 없이 전쟁을 지속하더라도 앞으로 몇 달간 전쟁 양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IISS에 따르면 러시아는 올해 국방 예산을 전년 대비 13.7% 늘린 15조6,000억 루블(약 244조4,500억원)을 책정했다. 이는 지방정부와 기업 보조금을 포함한 금액으로 올해 GDP 추정치의 7.5%에 달한다.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사일과 드론 공격, 최전선 군인 수십만 명에 대한 고액 월급 등으로 소련 시대 이후 최고 수준으로 군사 지출을 늘리고 있다. IISS는 "올해 러시아 연방정부 예산에서 국방·안보 관련 지출 비중이 40%에 이른다"며 "방위비 증액은 나라 경제의 차원에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이를 감당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32개 NATO 회원국의 방위비 증액 기조도 올해 전 세계 방위비를 늘리는 주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NATO 회원국의 최소 지출 목표를 현재 'GDP의 2%'에서 5%로 올려야 한다고 압박했다. 마르크 뤄터 NATO 사무총장도 회원국에 GDP의 3.7%까지 방위비를 증액할 것을 제안하며 복지 예산의 일부를 방위비로 전환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NATO의 유럽 회원국들이 GDP의 3~5%까지 방위비를 편성하면 유럽의 전체 방위비는 최소 2,000억 달러(약 288조원)에서 최대 8,000억 달러까지 늘어나 러시아의 방위비를 압도한다.
美·獨 등 주요국, 방위산업 생산력 강화
방위비 증액과 함께 글로벌 방위산업 시장이 성장하는 가운데 미국, 유럽 등 전통적인 방산 강국들은 자국의 생산 역량을 강화하고 외연을 확장하는 데 적극 나서고 있다. 일례로 그동안 인권 문제 등을 이유로 중동에 무기 수출을 금지했던 독일 정부는 최근 튀르키예에 전투기 유로파이터를 수출했고, 지난달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무기 수출금지를 해제했다. 이에 대해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부 장관은 공식 석상에서 "독일의 방산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 당면 과제"라며 "방산 강화를 위해 산업구조를 개선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대응한 군사력 강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최근 5년간 무기 수출국 순위에서 러시아를 누르고 2위에 올라선 프랑스는 유럽 내 안보 역량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병사 2,000명을 대상으로 군사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국산 무기 최대 수입국인 폴란드는 지난해 10월 리투아니아와 탄약 생산을 위한 공장 건설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에는 155mm 포탄 자체 생산을 위해 7억4,000만 달러(약 1조원)의 예산을 배정하기로 했다.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도 자체 포탄 생산 시설 확충을 끝냈다.
미국은 최첨단 무기뿐 아니라 재래식 무기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대부분의 재래식 무기 생산을 중단한 미국은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수요가 폭증한 155㎜ 포탄의 생산 역량을 높이기 위해 40년 만에 켄터키주 그레이엄에 트리니트로톨루엔(TNT) 생산 시설을 가동하기로 했다. 아울러 미국의 방위산업 및 항공우주 기술 스타트업 안두릴은 연내 극초음속 추진 시스템을 개발하고 호주에 공장을 세워 고스트 드론 생산을 확대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