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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서 기민당 재집권, AfD 2위 올라 메르츠 대표, 차기 독일 총리 유력 이민자·불황에 지친 獨 표심 ‘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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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 중도우파 연합 정당이 승리를 거두면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는 극우 정당으로 분류되는 '독일을 위한 대안(AfD)당'이 2당으로 급부상하며 독일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전후 독일 정치사에서 극우 정당이 이처럼 높은 지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최근 거세지고 있는 유럽 내 보수주의 물결이 이어진 결과로, 늘어나는 이민자 및 그로 인해 불안해진 치안과 둔화하는 경제성장에 대한 실망감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獨 중도우파, 정권 탈환
24일(이하 현지시간) AP통신·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전날 독일에서 실시된 연방의회 총선거 결과 중도우파인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이 28.52%의 득표율로 승리를 거뒀다. 극우 성향인 AfD는 20.8%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하는 돌풍을 연출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우 정당이 얻은 가장 높은 득표율로, 2021년과 비교하면 두 배가량 늘었다.
반면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이끄는 현 집권당인 중도좌파의 사회민주당(SPD) 득표율은 16.41%로 3위에 그치며 1887년 이후 최저 성적을 거뒀다. SPD의 현 연립정부 파트너 녹색당(Greens)은 11.6, 막판 돌풍을 일으킨 좌파당(The left)은 8.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독일은 선거법상 정당투표 득표율이 5를 넘거나 지역구 299곳에서 3명 이상 당선자를 내야 의석을 배분받는다. 이로써 전체 630석 가운데 CDU·CSU 연합이 208석, AfD 152석, SPD 120석, 녹색당 85석, 좌파당 64석을 확보했다. 연정 구성에 성공할 경우 프리드리히 메르츠(Friedrich Merz) CDU 대표가 총리를 맡을 전망이다. 메르츠 CDU 대표는 “이제 내 앞에 놓인 책임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승리를 선언했고, 숄츠 총리는 “씁쓸한 선거 결과”라고 패배를 인정했다.
독일의 정권 교체는 이민자 범죄 증가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결과다. 집권 SPD 정부가 이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면서 CDU·CSU 연합과 극우 성향의 AfD가 동반 약진한 것이다. 메르츠 대표는 자신이 총리로 취임하는 첫날 국경을 닫고 불법 이민자들을 돌려보내겠다고 공약하면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독일 경제의 부진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 경제는 21년 만에 처음으로 최근 2년 연속(2023년, 2024년) 역성장했다. 독일 제조업의 근간인 자동차 산업도 휘청이고 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값이 급등한 가운데 탈원전 정책으로 물가 부담이 커지고 산업 경쟁력도 약해졌다. 이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로존의 경제대국 독일은 지난 2년 동안 높은 에너지 가격과 중국 제조업의 맹공세에 시달리며 경기 침체가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 속 숄츠 총리 내각은 경제난과 이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민심의 평가를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2021년 12월 취임한 숄츠 총리는 우파 자유민주당, 녹색당과 ‘신호등 연정’을 구성했지만 성장과 복지를 둘러싸고 자민당과 내내 갈등을 겪었다. 결국 지난해 12월 의회에서 숄츠 총리의 불신임안이 통과돼 독일에서 이른 총선을 치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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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향우’ 기류 강해진 유럽의회
전문가들은 이번 독일 총선에서 최근 몇 년간 유럽에 거세게 부는 보수 바람이 재확인됐다고 평한다. 지난해 6월 치러진 '제10대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중도우파 세력이 약진하면서 유럽 27개국의 정치·경제 연합체인 유럽연합(EU)의 정치 지형 전반에 변화가 예고된 바 있다.
유럽의회의 의석수 분석에 따르면 1당인 중도우파 성향의 유럽국민당(EPP)은 전체 720석 중 186석으로, 이전보다 10석(전체 705석)을 늘린 반면, 제2당인 중도좌파 사회민주진보동맹(S&D)은 135석으로 2위 자리는 지켰지만, 기존보다 4석이 줄었다. 전체 의석 수가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비중 감소는 더 크다. 제3당인 중도 자유당그룹(Renew Europe·RE)도 이전 102석에서 23석이나 줄어든 79석에 그쳤다.
이에 반해 강경우파와 극우 성향 정치그룹은 크게 약진했다. 강경우파 성향 유럽보수와개혁(ECR)은 기존 69석에서 73석, ECR보다 더 극단으로 분류되는 극우 정치그룹 정체성과 민주주의(ID)는 49석에서 58석으로 의석이 대폭 늘었다. 이는 녹색당-유럽자유동맹(Greens-EFA)이 53석(-18석), 무소속이 45석(-17석), 레프트(The Left)가 36석(-1석)의 결과를 받아 든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마린 르 펜(Marine Le Pen) 대표와 그의 정치적 제자로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20대 조르당 바델라(Jordan Bardella)가 이끄는 극우 성향 국민연합(RN)이 약 31.5%의 득표율로 30석을 차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중도 성향 르네상스당(15.2%·13석)에 크게 앞섰다. 르네상스당은 유럽의회 RE의 일원이다. 그 외 RE 13석·레프트 9석 등이다.
독일에서도 EPP 일원인 CDU·CSU 연합이 30%의 득표율로 1위(29석)를 차지했고, 이탈리아에서는 신(新)파시스트에 뿌리를 둔 조르자 멜로니 총리의 이탈리아형제들당(FdI)이 24석(득표율 28.8%)으로 의석수를 2배 이상 늘렸다. 이탈리아형제들당은 유럽의회 ECR의 일원이다. 이어 S&D 21석·EPP(9석)·ID(8석) 등이다.
성장 엔진 꺼진 유럽에 ‘MEGA’ 돌풍
유럽의회 선거 이후 치러진 EU 회원국 총선에서도 극우 열풍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현재 이탈리아·네덜란드·핀란드·슬로바키아·헝가리·크로아티아 등에서 극우 혹은 강경 우파 정당이 정부를 이끌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 스웨덴에서 극우당이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으며, 지난해 9월 오스트리아 총선에서는 나치 부역자들이 세운 극우 자유당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극우 정당들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지지를 기회 삼아 세력 확장을 노리고 있다.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가 주도하는 극우 포퓰리스트 성향 ‘유럽을 위한 애국자’(PfE)는 지난 7∼8일 스페인 마드리드에 모여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구호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인용한 ‘메가(MEGA·유럽을 다시 위대하게)’를 강령으로 내세우는 등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유럽의 이 같은 민심 변화는 중동과 우크라이나 등에서 쏟아진 수백만 명의 난민 수용, 유럽 경제의 버팀목인 독일과 프랑스의 경제난 심화 등 ‘유럽 위기론’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 최대 경제국인 독일은 지난 2년 동안 높은 에너지 가격과 중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유로존 경기침체 우려가 커지자 작년 6월부터 지난달까지 정책금리를 다섯 차례 인하했다.
향후 전망도 암울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세계경제전망에서 올해 유로존의 경제성장률을 지난 10월보다 0.2%포인트 낮은 1.0%로 전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갈등이 계속해서 경제 심리에 부담이 되고 있다고 IMF는 진단했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도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어 유럽 내 강경 우파 돌풍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對)EU 무역적자를 이유로 유럽의 부가세를 사실상 관세로 간주, 고율 상호관세를 부과할 것을 시사해 유럽 내에선 인플레이션 재점화 우려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