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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신세계 이어 LG·현대차도 리츠 설립 자산 고가 매입 등 소액주주들 주주가치 훼손 주주 이익보단 그룹 자산유동화 ‘0순위’ 눈총

최근 부동산을 유동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를 설립하는 대기업이 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대기업이 리츠에 편입할 부동산 대부분이 알짜 핵심 자산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어차피 팔리지 않을 부동산을 개인 투자자에게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다. 또한 리츠가 성장보다는 그룹의 자금 조달 창구로만 활용되고 있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앞다퉈 리츠 설립하는 대기업들
4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LG그룹의 부동산 관리회사 디앤오(D&O)는 최근 국토교통부에 R&D리츠와 산업단지리츠 등 자산 개발 단계부터 투자하는 프로젝트 리츠 운용 계획을 담은 리츠 AMC(자산관리회사) 설립 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LG그룹 리츠에는 LG그룹 계열사 보유 부동산이 주로 담길 전망이다. LG그룹이 투자한 부동산으로는 LG트윈타워, 가산동 사옥, 광화문 사옥, LG서울역빌딩, 상도동하이프라자, 플래그원2 등이 있다. 대부분 LG그룹 계열사들이 본사 사옥으로 쓰고 있는 오피스 빌딩으로, 국내 상업용 부동산 시장이 활황인 점을 고려해 서둘러 자산 유동화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대차그룹도 현대얼터너티브자산운용을 만들고 리츠 사업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현대카드와 현대커머셜이 각각 51%, 49% 지분을 취득해 설립을 완료했으며, 우선적으로 금융사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 유동화를 검토할 계획이다. 현대얼터너티브는 현대차그룹 전체 전담 자산운용사 역할을 맡게 된다. 그간 현대차그룹은 자체 자산운용사가 없어 계열사 돈을 외부 금융기관에 위탁해 왔는데, 이번 설립으로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은 위탁 운용 수수료를 줄일 수 있게 됐다. 또 현대차, 기아 등 계열사 자금을 받아 운용해 부동산 및 인프라 투자도 보다 적극 나설 수 있게 됐다.
SK그룹도 계열사 생산 공장이나 연구소 등을 리츠를 통해 개발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SK그룹의 대표적인 리츠인 SK리츠는 오피스, 주유소 및 핵심 산업시설 등을 담고 있다. 총 운용자산(AUM)은 4조2,000억원으로 국내 리츠 중 최대 규모다. 신세계그룹 역시 교외형 복합 쇼핑몰인 '스타필드 하남'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신세계스타리츠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그룹의 각종 투자를 주도하고 있는 신세계프라퍼티는 현재 화성국제테마파크와 SSG랜더스의 새 홈구장이 들어서는 스타필드 청라 등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화성국제테마파크에는 약 4조5,000억원이, 스타필드 청라에는 1조원 이상 투입되는 조 단위 사업들이다.

알짜 자산 부족한 '속빈 강정'
대기업들이 앞다퉈 리츠를 만드는 건 유휴 자산을 유동화시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서다. 부동산을 매각하는 대신 리츠에 편입시키면 주주 자리를 지킬 수 있기도 하다. 실제 SK·한화·롯데 등 많은 대기업은 그룹이 보유한 사옥이나 백화점, 마트 등 자산을 리츠에 넘기며 현금을 확보해 왔다.
하지만 대기업들과 리츠 설립을 논의하는 자본시장 관계자들은 대기업이 리츠에 넘기려고 하는 부동산이 쭉정이 자산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몇 차례 매각하려다가 실패한 부동산을 리츠에 편입하려는 곳도 있다.
이미 상장해 있는 리츠들 사이에서도 이 같은 지적이 비등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롯데리츠다. 롯데리츠는 2019년 설립 초기부터 비우량 자산을 처분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아 왔다. 이는 포트폴리오 대부분이 마트와 백화점인 데다, 이마저도 롯데백화점 강남점과 지난해 편입한 호텔 L7 강남을 제외하면 모두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는 탓이다. 특히 아울렛이 문제였다. 아울렛은 도심이 아닌 외곽에 있다 보니 실질적인 땅의 가치는 크지 않다. 결국 롯데리츠의 배당금은 2020년 1주당 161원에서 2024년 112원으로 줄었고, 같은 기간 주가도 6,000원대에서 3,000원대로 반토막났다.
2023년 상장한 한화리츠도 롯데리츠와 닮은꼴이다. 한화리츠는 상장 당시 그룹 핵심 부동산이 빠졌다는 지적을 받았다. 한화손해보험 여의도 사옥을 제외하면 한화생명의 노원·구리·평촌·중동 사옥의 가격이 모두 1,000억원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한화생명으로부터 서울 장교동 한화빌딩을 매입했지만, 이 당시는 과도한 유상증자 규모로 논란이 일었다. 여기에 8,000억원의 빌딩 매입가 역시 그룹 이익을 위해 시세보다 비싸게 책정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대기업 '마이너스 통장' 전락
이렇다 보니 리츠가 주주가치 환원보다는 그룹이나 최대주주의 '마이너스 통장'으로 쓰일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팽배하다. 앞서 국내 최대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상장을 추진하던 홈플리스리츠의 상장이 무산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롯데리츠 역시 편입 자산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며 상장 공모 과정에서 상당한 부침을 겪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우려가 현실화한 핵심적 계기로 SK리츠 증자를 지목한다. SK리츠는 2023년 9월 SK하이닉스의 이천공장 수처리센터를 1조2,000억원에 매입키로 하고, 3,300억원 규모의 기습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이를 두고 SK그룹이 SK하이닉스에 유동성을 지원하기 위해 SK리츠 주주들의 돈을 끌어다 쓴다는 비판이 쇄도했다. SK리츠 측은 "해외 인프라펀드와의 경쟁을 통해 매입한 자산"이라고 항변했으나, 시장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SK리츠 유상증자 신주인수권(워런트)은 내재가치의 10분의 1 가격으로 거래되며 말 그대로 휴지조각이 됐고, 600억원의 실권 물량이 발생해 주관사단이 이를 떠안아야 했다.
그런데 SK리츠 사례는 역설적으로 대기업들이 회사채 발행이나 유상증자, IPO(기업공개)가 아니더라도 대규모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에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됐다. 환금성이 낮은 부동산 자산을 필요시 제값을 받고 비교적 빠르게 유동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리츠를 상장하면 일종의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 두는 효과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높아진 금리에 따른 부담도 리츠 투자자들에게 어느 정도 떠넘길 수도 있다.
당초 대기업 리츠는 국내 대기업이 모회사로 나서 자금조달이나 자산운용을 지원한다는 점 때문에 많은 일반투자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계열사로부터 자금조달을 기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우량 자산에 투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스폰서 리츠 특성상 그룹의 이해관계에 따라 거래가 진행될 가능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부동산 거래의 양 당사자가 모두 그룹 계열사로 그룹의 논리에 좌우될 수 있어 고가 매입, 비우량 자산 편입 등의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리츠 산업이 발달한 일본의 경우, 좋은 자산을 저렴한 시기에 매입해 임대료로 배당하며 꾸준한 현금흐름을 만든다. 이후 적기에 이를 매각함으로써 매각차익을 특별배당하고, 매각차익의 일부를 유보해 신규 자산 편입에 활용하는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 스폰서의 자산을 비싼 값에 사오고, 매입 부담은 유상증자를 통해 주주에게 떠넘기는 국내 리츠와는 크게 상반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