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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집행위, '유럽 자동차 부문 산업행동계획' 발표 자동차 업황 악화에 범유럽 전기차 보조금 지급도 검토 "자리 뺏길쏘냐" 韓·中 배터리, EU 역내 생산 확대 전망

유럽연합(EU)이 자동차 산업을 되살리기 위한 전방위적 지원 계획을 내놨다. 보조금 등을 통해 역내 배터리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무역 방어를 강화해 전기차 생태계 자립을 추구하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시장에서는 EU 배터리 시장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한국·중국이 차후 현지 생산을 확대할 가능성이 큰 만큼, 이 같은 자립 계획이 순항하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EU, 전기차 산업 지원 계획 제시
5일(현지시각) EU 집행위원회는 ‘유럽 자동차 부문 산업행동계획’을 발표했다. 해당 행동계획은 전기차의 핵심으로 꼽히는 배터리 산업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며, 2030년까지 배터리 가치사슬 전반의 '유럽산 부가가치 비율'을 50%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목표도 담고 있다.
이를 위해 집행위는 배터리 제조 업체의 생산 라인 확대를 지원하는 '배터리 부스터'(Battery Booster) 정책 패키지를 내놓고, 향후 2년간 18억 유로(약 2조8,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배터리, 핵심 부품을 비롯한 청정 기술 장비를 확보할 시 보조금 규정을 간소화하는 '청정 산업 보조금 프레임워크'도 마련한다. 지원 대상과 관련해 집행위는 "유럽 기업과 파트너십을 통해 기술·노하우 공유가 이뤄지고, EU에 충분한 부가가치를 제공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역외(overseas) 기업도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역내 업계 보호 및 공정한 경쟁을 위해 무역 방어도 강화한다. EU는 중국 등 제3국 업체가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 생산시설을 두고 관세 혜택을 받는 행위, 즉 '우회 수출'을 막을 예정이다. 이에 더해 역외보조금규정(FSR) 등 기존 제도를 활용해 전기차 공급망 전반에서 발생하는 불공정 무역 행위를 적극적으로 단속, 외국 기업이 자국 정부에서 과도한 보조금을 받고 역내 기업 결합과 공공 입찰에 참여하는 행위를 규제한다.
위기의 유럽 자동차 시장
EU는 유럽 전역에서 전기차 구매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테레사 리베라 EU 청정·공정·경쟁 담당 수석 부집행위원장은 “범유럽 보조금을 통해 어려움을 겪는 유럽 자동차산업을 지원할 인센티브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일부 개별국이 자체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전기차 구매 인센티브 정책을 통합하고, 이를 범유럽에서 적용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처럼 EU가 전기차 시장에 대한 직접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은 유럽 자동차 산업이 침체 상태기 때문이다. 지난해 유럽 내 자동차 판매량(1,296만3,614대)은 전년 대비 0.9% 성장하는 데 그쳤다. 유럽 최대 자동차 기업 폭스바겐의 지난해 판매량은 903만 대로 전년(924만 대) 대비 2.3% 감소했으며, 2024년 1월부터 9월까지의 영업이익률은 2.1%로 당초 목표였던 6.5%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승용차 부문 영업이익률 역시 2023년 12.6%에서 지난해 8.1%로 떨어졌다.
가성비로 무장한 중국 전기차 기업들이 역내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는 점도 EU 입장에서는 상당한 위기다. 시장조사업체 자토다이내믹스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유럽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산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18.2%로 전년 동기(13.1%) 대비 5.1%p 늘었다. 특히 중국 전기차 1위 기업 비야디(BYD)는 상반기에만 전년 유럽 전체 차량 판매량(1만4,000대)을 웃도는 1만7,000대를 팔았다.

변수는 韓·中 배터리
다만 이 같은 유럽의 '생태계 독립' 노력이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중국과 한국의 배터리·전기차 기업들이 EU 역내 생산을 늘릴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배터리 업체인 중국 CATL은 헝가리에 73억 유로(약 11조원) 규모 배터리 공장을 건설 중이며, 세계 4위 완성차 그룹 스텔란티스와 협력해 스페인에 추가로 배터리 공장을 지을 예정이다. 스페인 공장 투자 규모는 41억 유로(약 6조2,000억원)에 달한다.
또 다른 중국 배터리 업체인 고션도 슬로바키아와 모로코에 25억1,400만 유로(약 3조7,000억원)를 투입해 배터리 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BYD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헝가리와 튀르키예에 각각 연간 생산량 20만 대, 15만 대 규모의 전기차 공장을 짓고 있다. 지난해 10월 EU가 중국산 전기차에 최고 45.3% 관세를 부과하며 무역 장벽을 세운 가운데, 현지 생산 기지를 확충하며 활로를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역시 탄탄한 현지 생산 역량을 바탕으로 시장 장악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들 기업의 유럽 내 배터리 공장 생산능력(CAPA)은 약 220GWh(기가와트시)에 달한다. 이는 약 320만 대의 전기차를 생산할 수 있는 물량이다. 이와 관련해 한 업계 관계자는 " 배터리 3사는 현재 유럽 역내에서 연간 약 100만 대분의 배터리를 생산하며 생산 능력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만약 유럽의 배터리 보조금이 유럽 역내에서 조달한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발표될 경우, 유휴 생산 능력을 활용해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