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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집약 산업, 부채에 민감 반응
“부채와 재정 건전도는 별개” 주장도
연구 인력 축소, 수익성 악화에서 기인

정부 부채가 증가할수록 해당 국가의 산업 성장률 또한 악화할 것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 나랏빚이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를 저해해 산업 성장을 가로막고, 종국에는 국가의 경제 성장률까지 끌어내린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주장은 거시 경제 관점에서 부채는 국가 성장에 필수 요소라는 학계의 이론에 상충하는 분석으로, 향후 재정정책 수립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전망이다.
“부채 누적 시 투자 불확실성 해소 필요”
11일 IMF에 따르면 36개 선진국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높은 시기(중앙값 기준) 산업 성장률은 평균 2.6%로 부채 비율이 낮은 시기(3.2%)보다 0.6%p 낮게 나타났다. 칸 세버(Can Sever) IMF 연구원은 지난달 발표한 ‘정부 부채와 성장: R&D의 역할(Government Debt and Growth: The Role of R&D)’란 제목의 워킹페이퍼에서 이같이 밝혔다.
정부부채 증가에 따른 성장률 악화는 R&D 집약도가 높은 산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집약도가 높은 고기술 산업의 성장률은 부채가 많을 때 2.8%로 적을 때(3.9%)와 비교해 1.1%p 낮았다. 반면 R&D 집약도가 낮은 저기술 산업의 성장률은 부채가 많을 때 2.4%, 적을 때 2.7%로 0.3%p 차이에 그쳤다.
이 같은 결과를 토대로 부채가 더 증가하는 시나리오에 대한 분석도 이어졌다. 분석 결과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상위 25%인 국가의 고기술 산업 성장률은 저기술 산업 대비 0.5%p 추가로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부채가 많은 국가의 화학, 컴퓨터, 의료 산업 등 상위 5개 산업의 성장률 손실 폭은 2%p에 달했다. 전체 산업 성장률이 2.9%라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큰 폭의 성장 손실이다.
IMF는 오는 2029년 한국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60%에 육박할 것으로 내다봤다. 세버 연구원은 “기존 재정정책은 단기간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지만, 부채가 누적될 때의 투자 환경 불확실성을 해소하진 못한다”고 짚으며 “장기적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반면 학계에서는 거시 경제 관점에서 국가부채는 필수라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모두가 저축만 하면서 아무도 빚을 쓰지 않는 경우, 과잉공급에 따른 재고 적체와 기업의 수익 저하를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반대로 부채를 통해 소비나 투자를 촉진하면 경기회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는 기업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대규모 투자 지출에 대응하고자 외부 자금 조달을 확대한 반도체 장비업체 테스(TES)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앞서 테스는 반도체 업황이 악화하던 2023년 6월 636억원을 투입해 R&D 시설을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시장 상황보다 차세대 장비 개발을 통한 미래 경쟁력 확보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테스의 지난해 연결기준 부채총계는 506억원으로 전년(229억원) 대비 120%가량 증가했다. 이에 따라 부채비율도 7.7%에서 15.3%로, 7.6%p 늘었다. 언뜻 보면 부채의 증가 폭이 매서운 것 같지만, 과감한 투자 결과 실적 또한 대폭 개선됐다.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은 2,401억원으로 2023년과 비교해 63.4%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372억원 흑자전환했으며, 순이익은 433억원으로 1년 사이 2,666.6% 급증했다. 업계에서는 테스의 실적 성장세가 올해도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원장은 “시장이 과거와 같은 상황에서 기업이나 정부의 부채를 줄이면 부채 감소가 수요 위축으로 이어져 경기침체를 부추길 수 있다”고 짚으며 “경기침체기에 정부가 적자재정을 편성하는 것도 소비나 투자를 증가시켜 경기회복을 앞당기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업 및 국가 부채 증가를 재정 건전도의 하락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외채무 건전성 지표 낮은 수준 유지
한국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2023년 기준 46.9%로 꾸준히 증가세에 있다. 이 같은 정부부채 증가의 배경에는 기업의 수익성 악화가 자리하고 있다. 장기화한 내수 침체에 수출까지 위태로워지면서 경제 전반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주력산업인 반도체, 자동차는 꾸준한 수출을 기록 중이지만, 신성장산업인 인공지능(AI), 로봇, 바이오 등은 미국이나 중국과 비교해 경쟁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가 지원 역시 열악해 미래 성장성도 담보할 수 없는 실정이다.
고령화에 따른 의료비용 및 복지비용 증가도 정부부채 증가에 일조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경제 활동 인구 감소로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소비와 투자 위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가속하면서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국내 주민등록 인구 5,122만 명 중 1,024만 명이 만 65세를 넘었다. 노인인구 비율이 20%에 도달하면서 우리 사회는 ‘초고령화’에 접어들게 됐다.
2019년을 기점으로 빠르게 증가하던 정부부채는 지난해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2024년 국제투자대조표’에 따르면 한국의 지난해 말 순대외금융자산(대외금융자산-대외금융부채)은 1조1,023억 달러로 전년 말(8,103억 달러) 대비 2,920억 달러 증가했다. 대외금융자산은 2조4,980억 달러로 전년 말 대비 1,663억 달러 증가하고, 대외금융부채는 1조3,958억 달러로 1,257억 달러 감소했다.
다만 이는 원화 약세(달러 대비 원화가치 –10.2%)에서 비롯된 결과로, 경제 성장 및 재정 건전성 제고로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게 한은의 설명이다. 실제 지난해 말 순대외채권은 3,981억 달러로 전년 말(3,720억 달러)보다 261억 달러 늘며 2년 연속 증가했다. 대외채무에서도 단기외채가 1,469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62억 달러 늘었다.
이와 관련해 기획재정부는 “대외채무 건전성 지표가 전년 말 대비 소폭 상승했으나, 여전히 예년에 비해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며 “국내은행의 외화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CR)도 2024년 말 기준 171.8%로 규제 비율인 80%를 크게 상회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미국 신정부 정책 영향 및 주요국 통화정책 전환 등으로 국제금융시장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대외채무 동향을 면밀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경제 환경 변화에 R&D 투자 심리 위축
대내외 불확실성이 짙어지며 기업의 R&D 투자 심리도 꽁꽁 얼어붙는 양상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산기협)가 연구소 보유기업 중 표본기업 500개 사를 대상으로 지난해 11월 진행한 연구개발전망(RSI) 조사에서 2025년 투자 RSI는 94.6, 인력 RSI는 93.7로 2024년 전망치와 비슷한 수준을 보였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뒤인 지난해 12월 진행된 조사에서는 투자 RSI가 79.6, 인력 RSI가 84.2로 떨어졌다. 낙폭만 각각 15포인트, 9.5포인트에 달했다.
RSI 지수가 90 이하로 떨어진 건 해당 조사가 시작된 2013년 이후 처음이다. 팬데믹 당시에도 RSI 지수는 투자 91.2, 인력 91.6으로 91 이상을 유지했다. 산기협은 “글로벌 경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산업계 R&D 투자 심리 위축으로 이어졌다”며 “대다수 기업이 안정을 기대하면서도 내수 부진, 국제 관계 불안 등을 이유로 R&D 투자 여력이 없음을 토로했다”고 설명했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중기연)의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도출됐다. 기업의 R&D 투자가 감소하면서 관련 인력 또한 감소세를 나타낸 것이다. 지난해 12월 기준 기업부설연구소에 등록된 중소기업 재직 연구원 수는 20만1,644명으로 전년 동기(21만3,031명) 대비 1만1,387명 줄었다. 전체 연구원 대비 중소기업 연구원 비중 또한 2017년 57.8%로 정점을 찍은 뒤 줄곧 하락해 지난해 49.4%까지 떨어졌다.
중기연은 중소기업 근로자의 감소세가 연구개발 등 전문인력에서 시작해 이제 일반인력시장으로까지 확대되는 흐름을 보인다고 짚었다. 실제 업력 7년 이상인 종업원 5인 이상 중소기업 589개 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국내 중소기업의 44.4%는 올해 신규 채용 계획이 없거나 작년보다 채용을 축소할 계획인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