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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티기’로 전략 맞바꾼 양국
수출 효자 자동차에서 실익 챙길까
중국이 흔든 협상 지형에 일본 조바심

일본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당초 주장하던 ‘전면 철폐’ 입장을 일부 거둬들이며 세율 인하 또는 자동차 분야 협력으로 실익을 챙기는 전략으로 선회하는 모습이다. 이는 중국이 미국과 빠르게 합의를 마무리하면서 자국의 주장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판단 때문으로 풀이된다. 뒤늦게 전략 수정에 나선 일본이 협상 주도권을 놓친 채 외교적 소외 위험에 직면한 가운데, 이번 협상이 세계 무역 질서 전반에 미칠 영향에도 이목이 쏠린다.
협상 주도권 다시 미국으로
21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자동차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대한 미국의 관세 인하를 수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는 그간 자동차와 철강·알루미늄 산업의 파급 효과를 고려해 관련 관세의 재검토를 양보할 수 없는 핵심 사안으로 보던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난 것으로, 정체된 미일 협상을 타결짓기 위한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닛케이는 “정부 내 조바심이 커지고 있다”며 “향후 고려되는 단계는 관세 철폐 요구를 접고 ‘인하’로 수위를 낮추는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은 현재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 각국의 자동차·부품, 철강·알루미늄에 각각 25%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이에 더해 상호 관세 명목으로 각국에 공통 10%의 기본 세율을 설정했으며, 일본에는 14%의 추가 세율까지 적용했다. 다만 추가 세율에 대해서는 90일의 유예 기간을 둔 상태로, 그 시한은 오는 7월 9일이다.
미국은 일본과의 협상에서 25%의 철강·알루미늄 관세와 25%의 자동차·부품 관세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다. 상호 관세에 대해서도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10%는 재검토 대상이 아니며, 일본에 대한 추가 세율 14%만 일부 조정하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반면 일본 정부는 자동차 관세를 포함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면서 좀처럼 뜻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양국은 지난달 16일(이하 현지시각)과 이달 1일 미국에서 두 차례의 회담을 가진 데 이어 오는 23일 3차 협상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지난 19일부터 실무급 협의도 진행 중이다. 이번 3차 협상에서 미국과 일본은 △양국 간 무역 확대 △비관세 조치 △경제 및 안보 협력 등 세 가지 주요 분야에 초점을 맞출 전망이다. 닛케이는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최대 성과를 추구하는 자세를 잃지 않고 있다”면서도 “협상을 맡은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현실적인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자동차 안전기준 상호인증’ 절충 카드 제시
일본 정부는 관세 철폐를 고집하지 않는 대신 자국 산업에 실질적 이익이 돌아올 수 있는 협상안을 모색하고 나섰다. 가장 먼저 거론되는 대안은 ‘자동차 안전기준 상호인증’이다. 이는 미국과 일본의 자동차 산업이 서로의 규제를 인정함으로써 무역 장벽을 낮추는 방식으로, 비용 절감과 진출 시장 확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일본 입장에서는 관세 철폐를 포기하는 대신 최소한의 실익을 챙기려는 전략인 셈이다.
실제로 일본이 이번 협상에서 내세운 1순위 산업은 철강도 농산물도 아닌 자동차다. 세계 3위 자동차 생산국인 일본의 대미 자동차 수출량은 연간 136만 대에 달할 정도로 미국 의존도가 높다. 관세를 철폐하지 못하더라도 인증 규정을 단일화하면,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의 생산 효율성을 높일 수 있고, 이는 가격 경쟁력 확보 등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일본 정부의 판단이다.
일본 정부는 다가오는 3차 협상에서 과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당시 도출된 성과를 언급하며 미국을 설득한다는 구상이다. 당시 미일 간 협의에서는 룸미러 기준 등 7가지 항목에서 미국의 시험 결과를 일본 인증에 활용하는 데 합의한 바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과거 협의 성과를 바탕으로 상호 인증 범위를 확대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日 지도부 외교 능력 시험대
일본이 협상 전략을 바꾸게 된 데는 중국의 전격적인 행보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은 이미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빠르게 인하 수준에 합의하며 일종의 ‘선제 타결’을 이뤘다. 그간 초고율 관세로 맞서던 미국과 중국은 12일 공동성명을 내고 각각 상대국에 부과했던 관세 145%와 125%를 나란히 115%p씩 인하한다고 밝혔다. 양국이 관세 문제로 부딪히는 사이 미국과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것으로 기대했던 일본으로서는 셈법이 복잡해지는 지점이다.
나아가 미국은 중국과 정해놓은 기준선을 다른 국가들과의 협상에도 비슷게 적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가장 큰 마찰을 빚던 중국과 이미 협상의 룰을 정립한 만큼 일본에만 유리한 별도 조건을 내줄 경우, 형평성 논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현재 미국은 중국과 후속 협상을 진행 중이며, 중국을 제외하고도 18개 주요 무역국과 동시에 협상을 진행 중이다.
이런 가운데 일본 내부의 정치적 부담 또한 커지는 모습이다. 관세 전면 철폐가 무산되면, 자칫 ‘외교 실패’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이나 중국처럼 미국과의 협상에서 일정 부분 실익을 챙긴 국가들과 비교당할 경우엔 자국 내 비판 여론 또한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관세 협상이 단순한 무역 문제를 넘어 글로벌 외교 질서 재편과 직결된 만큼 일본이 전략적 소외를 좌시할 수 없을 것이란 게 외교계의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