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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영향으로 재무장 추진 나토, 독일에 병력 4만 명 증원 요구 새 정부 안보 드라이브에 연일 "전쟁 대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재무장을 추진하는 독일에서 징병제 논의가 다시 불붙고 있다. 자원입대에 계속 의존해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목표치를 채우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2011년 모병제 도입 이후 14년 만에 징병제가 거론되는 가운데, 독일 내부에서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이 의무복무 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남여 모두 의무복무 도입” 주장
9일(현지시각) 주간지 슈테른에 따르면 토마스 뢰베캄프(Thomas Röwekamp) 연방의회 국방위원장은 “학업을 마치는 70만 명 중 연방군 복무를 선택하는 사람은 1만 명에 불과하다. 자유와 번영을 누리려면 타인의 의무에만 기대선 안 된다”며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반적 의무복무제 도입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의무복무는 군입대를 포함해 소방서 등 각종 공공기관에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근무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부터 2011년 폐지한 징병제를 부활하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국방부가 지난해 만 18세 남녀를 대상으로 군 복무 의사와 능력을 설문한 뒤 자원입대를 받는 병역법 개정안을 내놓으면서 논의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최근 국방부가 현역 병력을 최대 33% 늘려야 한다고 밝히면서 당장 징병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보리스 피스토리우스(Boris Pistorius) 독일 국방장관은 지난 5일 나토의 무기·병력 요구를 맞추려면 최대 6만 명의 병력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밝혔다.
독일 연방군 병력은 작년 연말 기준 18만1,150명이다. 당초 국방부 목표치 20만3,000명에서 4만 명이 더 필요하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나토가 독일에 7개 여단 병력 4만 명을 늘리라고 요구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피스토리우스 장관은 막사와 교육시설 등이 부족하다며 징병제를 통한 빠른 병력 증강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새 정부가 출범한 뒤로는 “시설이 예상보다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며 병력이 부족하면 징집할 수도 있다고 태도를 바꿨다.
'안보 독립' 내건 독일, 징병제 논의 다시 수면 위로
징병제 재도입 주장은 프리드리히 메르츠(Friedrich Merz) 총리가 미국으로부터 안보 독립을 내세우며 “독일군을 유럽 최강 군대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이후, 집권 기독민주당(CDU)에서 주로 나온다. 새 정부의 안보 드라이브에 발맞춰 당국자들도 러시아를 사실상 적국으로 상정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방군 합참의장 격인 카르스텐 브로이어(Carsten Breuer) 감찰관(육군대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나토와 더 큰 분쟁의 연장 선상에서 본다며 4년 안에 나토 회원국을 침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2029년 이전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밤 싸울 수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아네테 레니크엠덴 연방군 조달청장도 “우리에겐 심지어 3년뿐이다. 2028년까지 방어태세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며 올해 안에 100건의 무기 구매안을 의회에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내무부 산하 시민보호·재난구호청의 랄프 티슬러 청장 역시 “전쟁은 대비해야 할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믿음이 오랫동안 퍼져 있었다. 이제는 유럽에서 대규모 침략 전쟁의 위험이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하철역과 공공건물 지하공간, 지하주차장 등지의 대피시설 수용능력을 현재 48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4만 개인 경보 사이렌을 배로 늘려야 한다며 올여름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독일의 재무장, 독배 될 수도
다만 군사안보 전문가들은 독일이 재무장을 함으로써 러시아를 자극해 오히려 유럽의 안보 전체가 위험하게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는 단순한 군비 강화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의 전략적 정체성과 향후 외교안보 지형 재편이라는 구조적 맥락에 위치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재무장이 러시아의 위협을 명분으로 할 경우, 단기적으로는 독일이 유럽 내 유일한 대응 주체로 부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동유럽을 중심으로 러시아와의 직접적 협상을 모색하는 이중 트랙 전략이 분화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유럽의 전략적 응집력을 해체할 수 있는 잠재적 내분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과거 유럽은 러시아를 완전한 적대 세력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평화적 중재자 역할을 수행해 왔다. 독일과 프랑스가 견지해 온 이른바 '균형외교'는 유럽의 전쟁 회피 전략이자 외교적 자산이었다. 그런데 독일의 재무장이 이 구조를 전면 수정하는 신호탄이 될 경우, 유럽은 자칫 외교적 자율성을 상실하고 미국-러시아 간 대리전 구도에 깊숙이 매몰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지상군 전력에 구조적으로 취약한 유럽이 미국의 안보 우산 없이 단독으로 대외 전략을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론이다. 유럽연합(EU)은 단일대오의 전략수립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회원국 간의 군사력과 방위예산 격차는 여전히 크다. 군비 목표치 설정조차 합의가 어려운 상황에서 독일의 재무장이 단지 선언적 의미에 그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