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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리스크, 달러 위기 불씨 되나 예측불허 관세 정책, 글로벌 금융시장 '혼란' "달러 위기 발생시점 앞당겨" 로고프 교수 경고

해외 수출 기업들이 미국의 수입 업체들에 달러화가 아닌 자국 통화로 결제할 것을 요청하는 사례가 증가하는 등 국제 거래에서 달러를 기피하는 현상이 확산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고율 관세를 비롯한 여러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학계에서는 향후 4년 내에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에 중대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마저 나온다.
위안화 등으로 결제 수단 변경 움직임
16일(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은 미국 은행업계를 인용해 국제 거래에서 유로화, 중국 위안화, 멕시코 페소 및 캐나다 달러 등으로 결제 수단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US뱅코프의 파울라 커밍스 통화세일즈총괄은 “과거에는 공급업체 입장에서 달러화가 '신성불가침'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고객들이 결제통화를 바꾸는 데 주저했지만, 지금은 해외 공급업체들이 ‘우리 통화로 결제해 달라’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 기업들이 국제 거래에서 달러 대신 외국 통화로 결제하는 사례는 최근 급격히 늘고 있다.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줄이는 동시에 수출업체로부터 할인 혜택도 누릴 수 있어 전략적으로 결제 통화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US뱅코프는 과거에는 무역 결제에 있어 달러화가 기본 통화로 여겨졌지만, 현재는 기업들이 점점 더 다양한 통화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뉴욕 연방준비은행 자료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19년까지 미주 지역에서 수출 송장의 거의 전부는 달러화로 청구됐다. 또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도 해당 기간 달러화로 수출 송장이 작성된 비중은 평균 75%에 달했다. 하지만 최근 이러한 ‘달러 중심 무역 질서’에 점진적인 균열이 나타나고 있는 형세다.

亞 '탈달러화' 본격 가속화
이 같은 결제 통화 변경 움직임은 최근 미국 달러화의 변동성 확대 및 약세 기조와 무관하지 않다. 블룸버그 통화지수에 따르면 달러화는 올해 들어 주요 통화 바스켓 대비 8%가량 하락했다. 달러화는 지난해 4분기에만 해도 주요 통화 바스켓 대비 7% 급등했지만, 이후 급락세로 전환했다. 지난주 이후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긴장 고조로 달러화가 일시적으로 반등했으나, 계속해서 큰 폭의 변동성을 보이자 기업들은 이를 위험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환율 변동성이 커지면 기업들은 수익성 예측과 가격 책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달러화의 위상이 흔들릴 조짐을 보이자 금융시장에서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탈(脫)달러화도 본격적인 속도를 내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에 따르면 동남아시아 국가연합인 아세안(ASEAN) 내 탈달러화 흐름은 2022년 이후 축적된 달러 예금을 자국 통화로 점진적으로 환전하는 흐름과 대규모 투자자들이 외환 리스크를 적극적으로 헤지(hedge)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실제로 아세안은 2026∼2030년 경제공동체 전략 계획을 통해 무역·투자에서 현지 통화 사용 확대를 공식 채택했다. 이 계획에는 환율 변동성에서 오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현지통화 결제(Local Currency Settlement) 촉진과 역내 지급결제 연결성 강화가 포함됐다. ING의 외환 전략가 프란체스코 페솔레는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적인 통상 정책과 달러 가치 급락이 다른 통화로의 이행을 가속화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2000년 70%를 넘었던 전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달러 비중은 2024년 57.8%로 감소했다. 올해 들어 달러화는 특히 4월에 큰 폭으로 매도됐는데, 이는 미국의 정책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케네스 로고프 교수 “4년 내 달러 기축통화 위기 올 것”
이처럼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급속도로 약화되고 있는 가운데, 학계에서는 구조적 위기에 대한 경고가 제기되고 있다. 케네스 로고프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9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충격으로 달러 위기가 최근 자신의 예측보다 앞당겨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로고프 교수는 지난달 ‘우리의 달러, 당신들의 문제’(Our Dollar, Your Problem)라는 제목의 신간에서 달러가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태환 제도를 일방적으로 폐지한 이른바 ‘닉슨 쇼크’ 이래 가장 큰 도전에 직면했다고 평가했다. 달러 지배력은 이미 2015년에 정점을 찍었으며 향후 5~7년 이내에 본격적인 구조적 전환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런데 이번 SCMP와의 인터뷰에서 구조적 전환이 일어날 위험성을 4년 이내로 좁히면서 그 이유로 '트럼프 리스크'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달러의 구조적 위기는 트럼프뿐 아니라 미국 전체의 잘못이라고 통찰했다. 로고프 교수는 "트럼프는 달러 위기를 가속하는 촉매제지, 그 자체가 원인이 아니다"라며 "문제는 이미 다가오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어 "로마 제국의 몰락은 외부의 적들 못지않게 내부 문제에서 비롯됐다"며 "미국은 몇 가지 심각한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부채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채무국으로 선진국 부채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그는 "기업 채권 역시 마찬가지로, 미국은 선진국 기업 채권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이는 특히 금리가 상승할 때 취약해지는데, 미국은 금리에 도박을 걸었다"며 "그동안 항상 매우 낮은 실질 금리는 0% 또는 심지어 마이너스 금리였는데, 이제 더 정상적인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로고프 교수는 "세계 최대 채무국은 금리가 상승하면 가장 취약해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는 역대 최대 규모의 감세를 원하기 때문에 이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며 "하지만 미국의 부채 수준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시장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국채 금리가 계속해서 상승할 것이고, 더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미국이 부채 문제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란 설명이다. 이어 그는 "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달러 위기의 또 다른 이유는 좌파와 우파 모두의 압력으로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독립성이 상실될 수 있다는 점"이라며 "그러면 달러는 엄청나게 약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