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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수급과 무관한 초과 흥행 반복
실수요보다 ‘주문받는 흉내’ 가까워
유동성 위기엔 장기물로 ‘시간 벌기’

SK그룹 계열사들이 시장의 예상을 뒤엎고 대규모 회사채 발행에 연이어 성공한 가운데, 그 배경에 비정상적 영업 구조가 작동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회사채로는 이례적인 10년 장기물까지 청약 수요가 몰리면서 이 같은 의혹은 한층 짙어지는 양상이다. 금융당국은 실수요가 아닌 내부 수요 기반의 매입 구조가 자본시장 전체의 투명성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왜곡된 수요로 유동성 조작
1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SK그룹 계열사 5곳(SK가스·SK지오센트릭·SK인천석유화학·SK디스커버리·SK엔무브)이 발생한 채권들은 대부분 발행 직후 유통시장에서 액면가를 밑도는 가격에 거래된 것으로 파악됐다. SK인천석유화학의 26-1회차 채권은 발행 당시 1만원이던 가격이 9,961원까지 떨어져 0.39%p에 달하는 하락률을 보였고, SK가스 42-1회차 채권은 0.15%p가량 가치가 깎였다.
이들 채권은 표면적으로 모두 A+ 이상의 신용등급을 보유한 우량물로 평가됨에도 액면가 이하로 거래되면서 ‘이상 거래’로 평가됐다. 한 채권운용사 관계자는 “유통시장에서 BBB급 이하 신용도를 가진 물량을 제외하고 우량 채권이 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액면가 이하로 거래되는 건 정상적인 거래로 볼 수 없다”며 “캡티브 영업 후 수수료를 녹여 다시 시장에 내놓는 인위적 거래일 공산이 크다”고 설명했다.
캡티브 영업은 증권사들이 계열사나 관계사를 동원해 회사채 수요예측에 참여시키는 방식을 말한다. 이를 통해 발행사는 낮은 금리로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는 이점을 얻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왜곡된 수요가 창출된다는 점이다. 기업이 계열 금융사를 동원해 자사 채권을 매입하거나, 특수관계 투자자에게 일정 수익을 보장하며 채권을 떠넘기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런 방식은 수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유동성 조작이자 시장 교란으로 작용한다.
최근 금융당국은 이 같은 캡티브 기반 이상 거래를 정조준해 조사에 나선 상태다. 특히 채권자본시장(DCM) 내에서 사모투자와 유사하게 움직이는 자기자본투자(PI) 구조에 주목하는 모습이다. 일부 증권사가 기업과 사전 조율된 방식으로 채권을 매입한 뒤, 할인율을 반영해 제삼자에 재매각한 정황을 포착했단 전언이다. 이 과정에서 형식상으로는 공개 발행이지만 실질은 사모에 가까운 우회 거래로 왜곡됐다는 게 금융당국의 지적이다.
청약 ‘초대박’ 이면엔 뒷약속 존재 가능성
이 같은 이상 기류는 지난해 상반기부터 본격화했다. 금리 불확실성과 신용 경색 우려 속에서도 일부 기업의 회사채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초대박’을 기록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량채가 아니면 투자 선호도가 낮아지는 시장 분위기에도 몇몇 기업의 발행물은 연달아 흥행에 성공했다. 겉으로는 활황처럼 보이지만, 실질 수요가 아닌 사전 약정된 물량이 채워졌다는 의혹 또한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으로는 지난해 3월 수요예측에서 총 모집 물량의 17배에 가까운 1조190억원의 자금이 몰린 HD현대건설기계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당시 수요예측에는 KB증권, NH투자증권, 삼성증권을 포함해 총 9개에 달하는 증권사가 주관사 및 인수단에 이름을 올렸다. 반면 기존 ‘큰손’이었던 연기금이나 공제회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 기관 투자자는 민평금리(민간채권 평가회사 평균금리)보다 낮은 수준으로 청약을 진행할 수 없는 탓이다.
반면 증권사들은 2년물 기준 민평금리 대비 –50~-44bp(bp=0.01%p)에서 주문을 넣었다. 채권 가격과 금리가 반비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 증권사는 시장의 평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HD현대건설기계의 채권을 산 게 된다. 이는 곧 실질적인 투자 판단이 아닌 관계자 간의 암묵적 합의에 따라 채권이 소화됐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실상 ‘불공정 유인’에 가깝단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캡티브 영업이 반복되면 시장 왜곡 또한 심화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정상적인 투자자들은 가격 경쟁에서 밀리거나, 정보 격차로 인해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탓이다. 나아가 수요가 과장된 채권의 발행이 증가하면서 기업의 실제 신용 위험도와 무관한 평가가 이뤄질 가능성도 커진다. 외형적으로는 안정적인 시장 활성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특수관계자의 ‘뒷약속’이 기초가 된 허상일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커진다.
더불어 캡티브 영업의 반사이익을 받는 증권사들의 존재도 주목된다. 일례로 한국투자증권은 지난해 LG화학의 2년물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국내채권트레이딩부와 기업금융투자부, 채권상품부 등 계정을 통해 ‘셀프베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KB증권과 NH투자증권 역시 올해 1분기 진행된 SK·LG그룹 회사채 발행에서 주관사로 선정되기 위해 사전 청약에 계열사를 동원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금융당국은 이들 증권사가 규제를 우회하면서도 일정 수수료 또는 회수 조건을 통해 이득을 챙겼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정직한 방식으로 발행을 유도하는 금융기관은 역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 같은 불균형이 시장의 신뢰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현재 금감원은 삼성증권, 미래에셋증권에 대한 검사를 완료한 후 신한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에 대한 검사를 진행 중이다.

신뢰 아닌 이해관계로 진행되는 거래
최근 채권시장에서 가장 뚜렷한 온도차를 보인 두 그룹이 있다면 바로 삼성과 SK다. 비슷한 시기, 유사한 신용등급을 가진 두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채권 발행 성과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지난해 하반기 회사채를 발행한 삼성그룹이 시장 반응에 따라 신중하게 물량을 조절한 반면, SK그룹은 거침없이 대규모 물량을 쏟아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SK그룹의 채권은 대부분 완판됐다. SK그룹 계열사가 발행한 회사채 규모는 올 1분기에만 2조원에 달한다.
시장 참여자들은 이 같은 상황을 “잘 팔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팔아준 것”이라고 요약했다. 최근 시장 내 SK그룹의 유동성 위기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같은 완판 행진은 정상적인 상황으로 볼 수 없단 지적이다. 실제 SK그룹은 2023년 이후 계열사 전반에 걸친 투자 확장과 실적 부진이 겹치면서 자금난을 겪었고, 이에 따라 시장의 체감 신용도 또한 뚜렷한 하락세를 그려 왔다.
SK그룹은 지난 5월 회사채로서는 이례적인 ‘10년물’ 채권까지 완판시키며 이 같은 시장의 의혹에 힘을 보탰다. SK브로드밴드가 발행한 10년물 포함 공모채는 300억원 모집에 3,100억원의 수요가 몰렸다. 이율 또한 민평금리 대비 45bp 밑도는 수준에서 결정됐다. 일반적으로 3년 또는 5년 만기 중심의 회사채 시장에서 10년물을 받아줄 투자자는 극히 제한적이다. 이 때문에 누군가가 이 물량을 ‘받아주고’ 다시 할인율을 적용해 재매각하는, 전형적인 캡티브 영업 구조가 작동한 것이란 시선 또한 설득력을 얻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