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딥폴리시] 원폭 피해 두 도시의 재건 방식과 시사점
Picture

Member for

8 months
Real name
김영욱
Position
연구원
Bio
[email protected]
경영학 전공에 관리자로 일했고 재무, 투자, 전략, 경제 등이 관심 분야입니다. 글로벌 전문가들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되새김질해 그들의 글 너머에 있는 깊은 의도까지 전달하고자 합니다.

수정

일본 원폭 피해 두 도시, 복구 방식 ‘달라’
평화주의 상징 vs 문화 산업 도시
‘비전과 스토리텔링의 중요성’

본 기사는 VoxEU–CEPR(경제정책연구센터)의 칼럼을 The Economy 편집팀이 재작성한 것입니다. 원문 분석을 참조해 해석과 논평을 추가했으며 본 기사에 제시된 견해는 VoxEU 및 CEPR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인류 역사상 원폭 피해를 겪은 최초이자 유일한 도시가 됐다. 그런데 처참한 잿더미에서 회복하기 위해 두 도시가 취한 방법은 완전히 달랐다. 위기 후 도시 재건과 정체성 구축을 고민하는 다른 도시가 있다면 이들의 이야기를 참고해 보자.

사진=ChatGPT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피해 복구 ‘차이’

1945년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Little Bomb)라고 명명한 원자탄을 투하했다. 폭발과 함께 즉사한 시민이 7만에서 8만 명이었고 연말이 되자 사망자는 110,000명을 넘었다. 히로시마 원폭 3일 후에는 나가사키에 ‘팻 맨’(Fat Man)이 떨어져 75,000명이 사망했다. 히로시마는 건물의 70%가 파괴됐고 나가사키는 1/3을 잃었다.

그리고 철저한 파괴의 현장에서 전혀 다른 두 도시가 생겨난다. 히로시마가 전 세계적인 평화의 상징 위에 도시를 재건했다면 나가사키는 문화적 다양성과 국제적 교류를 부흥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히로시마는 반핵 외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나가사키는 다원주의(pluralism)와 상업을 껴안았다.

히로시마, ‘평화주의 상징’으로

원폭 4년 만에 일본 정부는 ‘히로시마 평화 기념 도시 건설법’을 제정해 히로시마가 평화의 상징으로 재정의될 것임을 명확히 했다. 폭격의 중심지였던 도심은 파괴된 모습 그대로 보존했는데, 산업 진흥관(Industrial Promotion Hall)의 잔해도 그대로 남겨져 이후 평화 기념관이 된다.

1955년에는 평화 기념박물관이 세워지고 히로시마는 전 세계의 지원과 주목의 대상으로 바뀐다. 얼마 되지 않아 인구는 83,000명에서 146,000명으로 늘어나고 50년대 중반에 이르자 전쟁 이전인 350,000명을 넘어선다. 매년 8월 6일 시장이 낭독하는 ‘평화 선언’도 국가적 의식으로 자리 잡는다.

상징과 공간 디자인을 결합한 전략은 인구를 다시 도심으로 끌어들이고 도시 재건과 경제 성장의 주춧돌이 된다. 90년대가 되면 매년 150만 명이 히로시마를 찾을 정도로 관광 산업이 발전한다. 2018년에는 무려 174만 명이 평화 박물관을 찾았다.

도심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른 히로시마 인구밀도
주: 도심으로부터의 거리(㎞)(X축), 인구 밀도 로그값(㎢당)(Y축), * 붉은색 점선은 1945년 원폭 직후 상황, 검은색 점선은 원폭이 없었을 경우를 가정한 1950년 상황
시나리오별 히로시마 인구밀도 예상
주: 도심 응집 요소 결여(좌측), 재건에 대한 기대 결여(우측), 도심으로부터의 거리(㎞)(X축), 인구 밀도 로그값(㎢당)(Y축), 1945년 원폭 직후, 1950년 예상, 1950년 실제(보기 순서)

나가사키, 문화·산업 도시로 ‘제 갈 길’

나가사키는 다른 길을 걸었다. 상처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체성의 중심에 놓지는 않았다. 대신 일본의 국제적 관문이라는 위치에 주목했다. 나가사키는 이미 포르투갈 및 네덜란드 상인과 선교사들을 받아들여 번성하는 가톨릭 공동체를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유산이 도시 재건의 토대가 됐다.

1949년에 일본 정부는 ‘국제 문화도시 건설법’을 통과시켜 나가사키를 글로벌 문화 교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다. ‘순결한 수태 대성당’(Immaculate Conception Cathedral)을 복구하고 기독교 학교들을 다시 여는 한편 도시 전체에 서구의 건축 요소들을 입힌다. 기념 공원을 한곳에 짓기보다는 도시 전체를 일상에서 접하는 기념관으로 만든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산업과 무역에 힘쓴다. 미쓰비시를 중심으로 한 조선과 세라믹 산업, 항구 재건에 공을 들여 60년대가 되자 1인당 주민 소득이 히로시마를 앞서 나가기 시작한다. 사회 정책 면에서도 히로시마가 히바쿠샤(hibakusha, 원폭 생존자)에 대한 별도의 치료와 기념에 집중했다면 나가사키는 생존자 지원을 전반적인 의료 및 복지 서비스에 통합했다.

‘스토리텔링’의 중요성

표면적으로는 두 도시가 비슷한 길을 걸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평화 공원을 건설하고 박물관을 열었으며 해외 인사들의 방문을 반겼다. 하지만 근저에 놓인 접근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히로시마는 이른바 ‘상징에 의한 회복’(monumental recovery)을 추구했다. 대중의 기억과 상징을 중심에 놓고 평화 이념을 경제적, 정치적 회복에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히로시마는 핵무기 철폐 논의의 중심이자 국제회의의 주요 참석자가 될 수 있었다.

나가사키의 접근방식은 ‘다원주의적 회복’(plural recovery)으로 정의된다. 원폭의 기억을 미래지향적이고 다면적인 정체성에 함께 녹인 것이다. 기념의 공간으로 자리 잡는 대신, 가톨릭 학술 대회와 동서양 간 축제, 학문적 교류가 이뤄지는 ‘만남의 장’이 됐다.

두 도시의 경험에서 가장 크게 참고할 점은 뭘까? 위기 후 재건에서 기반 시설을 다시 세우는 것만큼 이야기(storytelling)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보여주며, 어떤 가치를 드높일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대중의 정서는 물론 경제 발전과 글로벌 위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물론 둘 중 하나만 선택할 필요는 없다. 전쟁이나 재난, 팬데믹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도시가 있다면 기념과 상징, 다원주의를 함께 섞어, 길고 어려운 재건 과정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원문의 저자는 다케다 코헤이(Kohei Takeda) 싱가포르 국립대학교(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조교수 외 1명입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Hiroshima: Resilience of city structure after the atomic bombing | CEPR에 게재돼 있습니다.

Picture

Member for

8 months
Real name
김영욱
Position
연구원
Bio
[email protected]
경영학 전공에 관리자로 일했고 재무, 투자, 전략, 경제 등이 관심 분야입니다. 글로벌 전문가들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되새김질해 그들의 글 너머에 있는 깊은 의도까지 전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