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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검열법 제정으로 인한 학문 자유 축소 주·연방정부 압박에 의한 고등교육 구조 변화 대학 자율성 약화 및 정체성 훼손 우려

미국 고등교육이 주 정부와 연방정부의 동시 압박 아래 근본적 변화를 맞고 있다. 올해 들어 26개 주에서 ‘교육검열법’이 잇따라 제정되며 강의 내용과 교수단 권한, 대학 운영 전반에 대한 정치적 개입이 제도화됐고,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민권법 위반을 근거로 대학 재정 지원과 면세 혜택 박탈 등을 추진하면서 대학의 자율성은 전례 없이 위축되고 있다. 이에 학계에서는 학문과 교육의 본질이 외부 권력의 설계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州 입법, 대학 자율성 잠식
8일 미국 교육계에 따르면 26개 주 의회는 올해 들어서만 고등교육을 직접 겨냥한 법안을 70건 넘게 발의했다. 그중 16개 주에서 22건이 법제화되며 교수단 권한·수업 내용·대학 운영 전반에 대한 직접 개입이 제도화됐다. 교육검열법이라 불리는 이 법안은 특정 주제 강의를 금지하거나 주 정부가 지정한 시민교육 과목 개설을 의무화하는 등 학문의 자유를 약화시키고 교과 과정의 성격 자체를 바꾼다. 현재 미국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이러한 규제를 시행하는 주에 거주하고 있어, 정부와 학계 간 권력 관계가 구조적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 해당 법안은 단순한 검열을 넘어 대학의 제도적 기반을 직접 흔든다. 인가(accreditation) 제도를 무기화해 독립성을 압박하고, 종신재직권(tenure) 심사 권한을 이사회로 이전시켜 교수단의 결정권을 해체한다. 이 모든 조치는 학문 탐구에 냉각 효과를 미치고 있으며 가파르게 경직된 환경 속에서 캠퍼스 내 자유로운 표현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트럼프의 '아이비리그 길들이기'
고등교육을 둘러싼 압박은 연방정부 차원에서도 거세게 이뤄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초 취임 직후부터 하버드 등 아이비리그 대학들과 전면전을 선포했다. 지난 4월엔 이들 대학이 인종·피부색·출신 국가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한 연방 민권법을 위반했다며, 모든 재정 지원과 면세 지위를 박탈하겠다고 압박했다. 이들 대학이 친(親)팔레스타인 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유대인·이스라엘인에 대한 괴롭힘을 방관했다는 논리다. 하버드대가 “헌법에 위배되는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반발하자, 백악관은 26억 달러(약 3조6,000억원) 규모의 연방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고, 지난 5월엔 하버드대가 유학생을 받을 자격을 박탈하기도 했다.
이에 하버드대는 5억 달러(약 6,957억원) 규모의 합의금을 지불하기 위한 논의에 들어가는 등 결국 백기를 들었다. 현재 하버드대는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지만, 내부에선 이미 몇 달 전부터 승소 여부와 관계없이 트럼프 임기 중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선 합의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연방 민권법에 따르면 이를 위반한 학교는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 없고, 만약 보조금을 복구하려면 합의금 지불과 정책 변경을 포함하는 자발적 시정 합의를 해야 한다.
컬럼비아대 역시 민권법 위반 혐의로 연방정부의 조사를 받아왔으며, 지난달 23일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벌금 2억 달러(약 2,784억원)를 납부하는 대신 매년 12억 달러(약 1조6,700억원) 이상의 연방 보조금을 다시 받기로 합의했다. 또 양측이 공동으로 지명한 외부 감시인이 입학, 교수 채용 등 합의 이행 여부를 점검하기로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컬럼비아대와의 합의 이후 같은 방식으로 다른 명문대들과의 협상도 추진해 왔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25일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가 컬럼비아대를 모델로 삼아 하버드대, 코넬대, 듀크대, 노스웨스턴대, 브라운대 등 다른 명문대학들과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미 고등교육 근간 흔드는 전방위 압박
이처럼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이중 압박은 고등교육 전반을 통제하는 체계를 강하게 형성하고 있다. 현재 텍사스를 비롯한 공화당 주의회는 정치 임명자가 교과 과정, 교수 채용, 인가 여부에 최종 결정권을 갖도록 하는 대대적 개편도 추진 중이다. 이러한 법적 구속은 연구비 동결이나 프로그램 요건 조정 등 연방정부가 구사하는 압박 수단과 맞물리며, 국공립·사립을 가리지 않고 모든 대학을 제도적으로 무력화한다.
실제로 현시점 미국 대학들은 더 이상 자율성을 본질성 속성으로 지니지 못하게 됐다. 중립성과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정부의 모든 층위에서 가해지는 압박은 학문과 교육의 본질을 잠식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를 두고 학계는 미 고등교육의 근간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정부의 압박이 지속되고 제도화될수록, 이 같은 변화는 일시적 조정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제 초점은 변화에 순응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니다. 권력과 제도의 압박 속에서 대학이 학문 공동체로서의 정체성과 자율성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가다. 하지만 교육과 연구의 방향마저 외부 권력이 설계하는 구조 속에서 대학이 그 정체성과 사명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